놀이터 앞 아이들에게 누구도 묻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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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 앞 아이들에게 누구도 묻지 않았다
[비필독도서 49] '어린이라는 세계'
  • 오학준 SBS PD
  • 승인 2021.11.20 13: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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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터에서 마스크를 쓴 아이가 놀고 있는 모습.Ⓒ뉴시스
놀이터에서 마스크를 쓴 아이가 놀고 있는 모습.Ⓒ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 相識滿天下 知心能幾人(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얼굴 아는 사람은 세상 가득하지만 속마음을 아는 이는 몇이나 될까.

김소영의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으며 영화 <벌새> 속 영지를 떠올렸다. 한문 학원 교사 영지(김새벽)는 은희(박지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먼저 물어보는 유일한 어른이다. 그는 안정적으로 보이던 세계가 조금씩 무너지던 1994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듯 무심히 살아가는 어른들을 보며 고통스러워하던 은희를 살게 하는 버팀목이었다. 그가 남긴 작은 말들은, 은희가 부서진 파편에 발을 다치지 않고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게 했다.

누군가를 만나 무엇인가를 나누는 것이 세상이고, 그런 세상이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말하던 ‘영지쌤’의 반짝거리는 눈빛이 이 책에도 한 가득 담겨 있다. 말 한마디에 손쉽게 부서질 만큼 작은 세계를 품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어른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깨닫게 만드는 문장이 곳곳에 남아 있다.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문장처럼, 자부도 체념도 없는 다정한 마음들을 꼭꼭 씹어먹느라 한참이 걸렸다.

작가는 이 책에서 세 개의 거울을 통해 어린이라는 세계를 독자에게 보여준다. 하나는 독서 교사로서 관찰한 주변 아이들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며 발견한 아이들의 모습이며, 마지막은 어른들이 빚어낸 세계 속에 놓여 있는 아이들의 모습이다. 각각의 장소에서 비치는 아이들의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모두 한 때 어린이였던 만큼, 그곳에 우리 모두의 모습이 있다.

작가는 어린이를 하나의 속성으로 환원하려 들지 않는다. 귀엽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허세를 부리고, 고집도 부리며, 혐오의 언어를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내뱉거나, 예의범절을 때때로 무시하여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존재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김원영이 '낭만적 예찬을 넘어서 – 이미지 시대의 아동을 생각하다'(<창비어린이>, 2019)에서 말했던 것처럼 “자신과 다른 피부색, 신체, 정신 구조를 가진 존재와 함께 있을 때, 어린이는 결코 아무 획책도 모르는 존재가 아니다.”

김소영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
김소영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

작가는 아이들을 ‘귀엽고 무해한’ 이미지로부터 떼어내어 한 명의 동료 시민으로서 어른과 함께/서로 자라는 어린이를 독자 앞에 가져다 놓는다. 어린이를 특정한 이미지로 소비할 수 있도록 다듬기보다, 그들의 눈높이에서 이야기를 듣는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꼼꼼히 되묻는다. 그리하여 어린이만이 배움의 대상이 아니라, 어른 역시 어린이를 통해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한다는 자명한(그러나 손쉽게 잊어버리는) 사실을 일깨운다.

어린이들에게 물어야 할 것들이 있어도 어른들은 잘 묻지 않는다. 한 아파트 단지에 있는 놀이터에 들어가려면 비표를 착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비판하는 기사에서도, 어른들의 분노나 항변만큼 아이들의 속내가 비치진 않는다. 놀이터 앞에서 서성이고 있는 아이들의 마음은 어떤지 누구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어른들은 잘 알지 못한다. 모두 어린이였던 날들이 있었음에도 다들 어느 날 갑자기 어른으로 태어난 듯 군다. 과거가 없는 듯이 구는 건 어른이 범하는 최악의 반칙인데도.

단지 어린이라는 이유로 밥과 차를 먹을 수 없다고 선언하는 공간 앞에서,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나이’라는 이유로 갑작스레 쫓겨나는 어린이의 마음은 어떨까? 공공 공간에서 자기 자리를 부정당한 이들에게 예의 없고, 불편하고, 방해하지 말라는 말부터 꺼내는 어른들의 세계는 어떤 말로도 정당화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마치 처음부터 예의범절을 타고 났던 것처럼 착각하는 어른들은 지금도 아이들에게 귀엽고 무해한 ‘착한 어린이’가 되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작가가 이야기하듯 어린이들은 “좋은 대접”을 받을 필요가 있다. 공공장소에서 지켜야 할 예절은 공공장소에서만 배울 수 있다. 때로는 예절을 어겨야만 체득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이곳에서 배제된 채 나이가 들었다는 이유로 다시 공공장소로 돌아온 어른-아이는 좋은 대접을 받을 기회를 놓쳐버리는 게 아닐까? 기회를 놓친 어른들의 공동체 속에서 어린이는 좋은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지혜로운 어른들이라면, 어린이를 배제하기보다 구르고, 넘어지고, 떨어지는 어린이들이 더 안전하게 배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싸매야 하는 게 아닐까.

살아남아 어른이 된 우리 모두의 마음 어딘가엔, 저마다의 ‘영지쌤’이 남겨 놓은 보드라운 말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어 누군가의 ‘영지쌤’이 되어야 할 시간에도, 자기 안의 어린이와 싸우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다. 그것만큼 어린 시절의 자신을 실망시키는 것도 없다. 고유한 세계를 가진 동료 시민으로서 어린이를 대하는 다정한 어른으로 있는 힘껏 살아라, 그것이 <벌새>와 <어린이라는 세계>를 관통하는 공통의 정서다. 언제나 이곳에 있었던 어린이들에게 눈길을 돌릴 때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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