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저널=손지인 기자] 교제했던 남성에게 여성이 살해당하는 일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지만 언론의 사건 규정은 본질에서 비껴나 있다는 비판이 나왔다.
지난 17일 30대 남성이 전 연인인 여성을 흉기로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로부터 이틀 뒤인 지난 19일에는 데이트 폭력과 스토킹 피해로 경찰의 신변 보호를 받던 한 여성이 옛 연인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사망했다.
앞서 ‘세모녀 살인 사건’은 ‘김태현 스토킹 살인 사건’으로, ‘n번방 사건’은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등으로 사건명을 바로 잡는 변화가 이어졌지만, 여성피해 사건의 본질을 감추는 보도는 여전하다.
<바람 핀 연인, 흉기로 찌르고 19층에서 내다 던진 남 “같이 죽으려고 했는데…”>(매일신문, 11월 19일), <서초구 아파트서 ‘여친 흉기살해’ 시신 던진 30대 “유족께 죄송”>(뉴스1, 11월 19일) 등의 보도는 ‘같이 죽으려 했다’는 가해자의 일방적인 주장이나 반성하는 듯한 가해자의 태도를 강조한 것이다.
<‘아파트 살인’ 30대 남성 구속 심사…“같이 죽으려 했다”>(YTN, 11월 19일), <17일 서초구 아파트서 ‘20대 여성 시신’ 떨어졌다…범인은 남자친구>(위키트리, 11월 18일) 등은 이번 교제 살해 사건을 ‘아파트 살인’이라고 규정해 사건에서 가해자를 지우거나 자극적인 표현을 동원했다.
해당 사건을 정쟁의 소재로 사용한 보도도 이어졌다. <이준석 “또 슬슬 범죄를 페미와 엮네. ‘남성=잠재적 가해자’ 프레임 사라져야”>(세계일보, 11월 21일), <진중권 “X소리”, 이준석 “멍청이”…페미니즘 ‘키보드배틀’>(이데일리, 11월 22일) 등 이번 여성피해 사건을 화제 거리 정도로 소비함으로써 해당 사건을 둘러싼 정치인의 SNS 발언을 그대로 옮겨 쓰며 정치인의 말싸움과 정쟁을 부추기는 보도였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이하 민언련)은 23일 논평을 내고 “108명. 2016년부터 3년간 ‘법적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서로 사귀다가 상대를 죽인 사건’의 여성 피해자들이다. 남성 피해자는 2명”이라며 “여성 피해자가 압도적으로 많고, 소수의 일탈이 아닌 구조문제에서 발생하는 범죄 경향이 짙게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이어 "하지만 일부 언론은 근본 원인을 지우는 방식으로 사건을 명명하거나 그런 주장을 하는 정치인 발언을 퍼나르며 정쟁화를 부추긴다. 가해자 입장을 전달하는 보도 역시 관행적으로 쏟아내고 있다”고 비판했다.
민언련은 “원인과 심각성을 감추는 사건 명명, 가해자에 불필요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보도 등은 또 다른 피해를 막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건의 본질을 분명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사건을 명명하고, 교제살인과 데이트폭력 등이 왜 반복되는지, 어떤 제도 보완이 필요한지 살피는 보도가 필요한 이유”라며 “반복되는 여성 살해 원인을 부정하는 일부 정치인 발언의 문제점을 짚고, 공론장에서 생산적 토론이 이뤄질 수 있게 하는 것도 언론의 주요한 역할”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