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곡이 뻔하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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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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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박재철 CBS PD] “왜 선곡이 생각의 범주를 못 벗어날까요?” 며칠 전 방송하다 본 청취자 문자다. 순간, 책 귀퉁이가 접히듯 마음이 살짝 접힌다. 이런 질문을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받는 나를 상상해본다. 나는 어떤 답을 할까? 

‘그럼 범주를 벗어나는 방송을 들으시죠, 좁은 범주에 갇힌 저희 같은 프로그램 말고' 라는 신경질적인 답변? 내 소심함에 이렇게는 못하지 싶고, ‘님의 청취 바운더리가 무척 넓으시군요. 앞으로 기계적이고 편의적인 선곡과 한 번 더 씨름해보도록 하겠습니다'라고 맘에도 없는 반응? 

음악 프로그램을 하다 보면 PD의 성향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하는 애청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사연이나 노래 뒤에 붙는 후속곡을 또 손금처럼 예측하기도 한다. 물론 적중률이 높다. “이 다음에 혹시 이 노래가 나오는 건 아니겠죠?” 즉흥적 피드백. 들킨 마음에 황급히 다른 곡을 찾는 나. 선곡 패턴이 읽힌 것! 패턴이 노출됐다면 바꿔줘야 한다. 휴대폰이든 프로그램이든. 개편에 따른 피디 교체는 사실 이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간파당한 패턴 선곡 말고도 PD로서 또 다른 고민거리가 있다. 매년 절기나 시즌마다 보드 판에 꽂힌 압핀처럼 꾹 눌러진, 고정 신청곡 메모들을 어찌 소화해야 할까 하는 문제. 

4월 벚꽃이 피면 장범준의 노래가 흩날리는 벚꽃 잎들처럼 마구 답지한다. 쿨의 노래가 나와야 여름이 온 듯 싶고,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는 9월만을 기다리고 있다. Wham의 Last Christmas는 앞으로 몇십 년 아니 몇백 년은 크리스마스 시즌을 책임져주지 않을까? 

이런 곡들은 선곡 유효기간이 그래도 넓은 편이라 적당한 타이밍에 신청곡이라는 명분으로 나가면 무리는 없다. 근데 10월 마지막 날 꼭 들어오는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나 새해 첫날이면 어김없이 소환되는 Abba의 ‘Happy New Year’ 같은 곡들은 많은 이들의 ‘생각의 범주’에 고성(古城)처럼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시즌별로 특정 곡을 듣고 싶다는 청취자의 요구는 늘 있다. 그리고 나가면 ‘예상대로’라는 청취자의 핀잔도 언제나 함께 따라온다. ‘틀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런 고민은 스튜디오 안에서 제법 빈번하다. 음악PD는 누군가의 생각의 범주 안팎이 아닌 그 범주의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사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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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후배는 이런 시즌송을 선곡할 때마다 명절, TV에 만나는 성룡 활극이나 스타워즈 시리즈 같다는 말을 한다. 뻔한 편성이고 봤던 거지만 나오면 또 재밌게 보게 된다고. 결론은 식상하단 소리 들어도 서운해할 사람들, 들어야 할 사람들을 위해 틀어주자는 입장이다. 맞는 말이다. 푸념이나 핀잔을 피하려고 송출을 안 하는 건 또 뭔가? 서비스업 종사자의 기본 태도가 아니다. 청취자가 듣고 싶어 하는 곡은 방송사에서 듣고, 내가 듣고 싶은 곡은 집에서 듣자. 

그런데 그 청취자층이 단일, 단종, 단색이 아니라는 데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음악 리스트를 직접 선곡해 세심히 듣는 청취자가 제법 많다. 상대적으로 PD의 음악 전문성은 점점 옅어져 간다. 듣기 편하면서도 뻔하지 않은 선곡 흐름은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3.14로 시작되는 파이 값이 그 끝이 없는 것처럼 내 경우, 제법 오래된 제작 경험도 이 문제에 관해선 별 소용이 없다.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늘 뻔하지 않은 선곡 리듬을 만드는 프로그램에서 10월의 마지막 날에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10월의 마지막 밤을~”이란 노랫말이 흘러나온다면 그건 식상이 아니라 작은 파격일 수 있지 않을까? “이 프로그램에서 이런 투명한 선곡을 하다니, 외려 신선한 걸…”

프로그램의 전체적인 밑그림이 다채롭고 다양하다면, 그 위에 찍히는 익숙한 몇 개의 점들은 오히려 또 다른 무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평소 선곡에 신경을 써보자는 자기 다짐으로 괜히 꺼낸 난제를 황급히 덮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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