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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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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박재철 CBS PD] 2년 전 국장 퇴임 감사패 문구를 썼다. 그로부터 2년 후 또 쓰게 됐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다.‘왜 강하게 거부하지 못했지?’ 자책도 잠시 해보지만 누굴 탓하랴. 

감사패에 진심을 담기 위해선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의 불을 서서히 지펴야 한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손에 쥔 펜은 물에 젖은 불쏘시개다. 불이 붙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 첫 문장이 제일 높은 허들이다. 

‘귀하는’으로는 시작하고 싶진 않았다. ‘귀하는’은 지위에서 출발한다. 누구여도 상관없을 호칭이 ‘귀하는’이다. 하지만 딱히 대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2년 전과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데자뷰.

지위가 아닌 사람으로 시작해보자. 국장의 또렷한 특징이 무엇이더라? 과묵. 그는 좀처럼 말이 없는 선배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나를 향해 날아오는 공을 라켓에 맞춰 다시 벽으로 보내듯, 무심히 궁리의 공을 머릿속에서 한참을 치다 첫 문장을 겨우 썼다.

“그의 입술은 대체로 닫혀 있다.” 이게 감사패의 첫 문장이라니. 후속 문장으로 첫 문장의 당황스러움을 말끔히 씻어줘야 한다. 아, 그런데 기름때다. 안 씻긴다. 첫 문장을 쓰고 포기. 내일로 미룬다. 다음날이라도 별 수가 있나. 피상적인 인상에서 출발해 뭔가 독창적인 문구를 뽑아내려는 내 허황된 욕심을 인정하기로 했다.

몇 줄 안 되는 감사패 문구를 쓰면서 이렇게 끙끙 대는 모습이라니. 그러다 이런 생각이 스친다. 주위의 지인들에게 써줄 감사패의 첫 문장 정도는 평소에 준비하자. 다른 말이 아니라 ‘그 사람을 좀 더 자세히 봐야겠다’는 다짐. 나태주 시인의 지적처럼 무릇 대상은 자세히 보아야 이쁘지 않다던가? 늘 건성으로 타인을 본 나를 반성하기로 했다.

또 하나, 감사패는 짧은 증언록이다. 그 사람이 여기 머물렀다는 족적을 담은 기록물. 어쩌면 여기저기서 받은 감사패는 이사 갈 때 일부러 분실하고 싶은 애물단지일지 모른다. 그래도 눌변이나마 누군가가 고심해서 남긴 문구 하나가 언젠가 자신의 발자취를 증언해주는 환기의 물품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본인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생의 어느 한 토막을 불러내는 타임 리프. 그래서 잠시나마 흐뭇할 수 있다면, 그 역시 나쁘지 않을 선물이다.  

내가 만약 감사패를 받는다면 어떤 내용을 읽고 싶을까. 나도 몰랐을 나의 어떤 면을 누군가가 알아채주면 기쁠까?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면서 밀린 숙제를 마쳤다.

그의 입술은 대체로 닫혀 있다. 
신중함인지 소심함인지, 아마 그 둘이 섞여 있지 싶다.
입술의 빗장이 걷어지면
정연한 말들이 그의 혀끝을 타고 흘러나온다.
입안에서 몇 번을 치고 말고 뭉쳤을 그래서 고아졌을
언어의 반죽이 단단한 벽돌처럼
맞춤한 단어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온다.

그 벽돌들은 하나둘 옆으로 이어져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다리가 되거나,
위로 쌓여 올라가 외부의 무례와 공격을 막아주는 성벽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그 덕으로 편안했다.

말을 다루는 공장에서 말의 쓰임을 유용하게 보여준 이로 기억될 것이다.
필드에서는 세상을 향해 건넬 만한 이야기를 구상하는 기획,
그리고 그걸 구현해내는 연출, 그 둘에 능한 피디로 손꼽힐 테지만
국장으로서의 그는, 민의를 숙의하는 방식의 의사결정을 선호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초기, 빠른 판단으로 선제적 방송사 셧다운을
언론사 최초로 감행했을 때는 오롯이 본인의 판단을 믿었다.

남모르게 주저했고, 적잖이 과민했으며
밤늦게까지 후회했을 2년의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려 애쓴
당신의 노고와 치적에 감사하며 이 패를 드린다.
         
2021년 12월 CBS 제작국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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