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범죄 보도에 피해자다움 요구하는 일러스트 '이제 그만'
상태바
성범죄 보도에 피해자다움 요구하는 일러스트 '이제 그만'
웅크린 피해자, 늑대 모습을 한 가해자 이미지 보도에 반복적으로 사용
"피해자다움 강조하는 일러스트, 피해자 위축될 수 있어"
  • 손지인 기자
  • 승인 2021.12.28 17:3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PD저널=손지인 기자] 고개를 숙인 채 잔뜩 움츠러든 성범죄 피해자와 피해자를 향해 커다랗고 검은 손을 들어 올려 위협하고 있는 가해자. 성범죄 사건 보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러스트들이 2차 가해를 일으킨다는 비판에도 근절되지 않고 있다. 

지난 26일 <조선일보>, <서울신문>, <이데일리> 등 다수 언론은 목욕하던 딸을 성추행한 50대 남성에게 징역 2년 6개월이 선고됐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중 가해자의 위협에 위축되어 있는 피해자의 모습을 묘사한 일러스트를 기사에 삽입한 경우가 다수 발견됐다.

<목욕 중인 성인 딸 성추행한 50대…징역형 선고>(아시아경제, 12월 26일)는 몸을 움츠린 채 앉아 땅을 보고 있는 여성을 향해 커다란 검은 손이 다가오고 있는 일러스트를 해당 기사에 삽입했다. <20대 친딸 강제추행한 50대 父 징역형>(뉴시스, 12월 26일)도 마찬가지다. 몸을 동그랗게 움츠린 채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여성에게 커다란 손으로 형상화된 가해자가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일러스트를 사용했다. 

지난 24일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고도 8살짜리 딸을 성폭행한 30대 남성이 재판에 넘겨진 사건을 전한 보도 속 일러스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에이즈 걸렸는데 8살 딸 성폭행 한 친부···검찰, 친권 상실 청구>(서울경제, 12월 24일)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여성의 어깨를 남성이 누르고 있는 일러스트를 사용했다. 더욱이 <에이즈 걸린 아빠가 8살 친딸을 성폭행…'악마를 보았다'>(파이낸셜뉴스, 12월 24일)는 침을 흘리는 늑대로 묘사된 가해자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피해자에게 다가가는 일러스트를 게재하기도 했다.

이는 언론이 자체적으로 정한 권고 기준에 반한다. 지난 2012년 한국기자협회와 국가인권위원회가 내놓은 ‘성폭력 범죄 보도 세부 권고 기준’은 ‘언론은 성범죄를 보도할 때 피해자와 그 가족의 인권을 존중해 보도로 인한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언론은 사진과 영상 보도에서 피해자 등이 2차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주의한다. 특히 삽화, 그래픽, 지도 제공이나 재연 등에 신중을 기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인터넷신문 기사 및 광고에 대한 자율심의기구인 인터넷신문위원회도 성범죄 보도에 선정적인 일러스트를 실은 언론사에 ‘주의’를 내리고 있다. 

지난 22일 공개된 제23, 24차 기사심의결정문에 따르면, 남성의 불끈 쥔 주먹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동의 모습을 담은 이미지를 함께 게재한 <성범죄자 의료기관 취업제한 강화...비의료인 취업 가능한 제도적 허점 개선>(뉴스클레임, 11월 30일)과 남성이 주먹을 들이대며 미성년 여학생을 협박하는 이미지를 실은 <“날 유혹했다” 13살도 안 된 학생 성폭행한 50대, 2심서 감형>(아이뉴스24, 11월 24일) 등에 ‘주의’를 결정했다.

결정문에서 인터넷신문 기사심의분과위원회는 해당 기사들에 대해 “과도한 혐오감, 불쾌감, 공포심, 성적 수치심 등을 유발하는 표현을 하지 않도록 명시한 인터넷 신문 기사심의규정 제5조 제1항(선정성의 지양)을 어겼다”고 설명했다.

인터넷신문위원회 기사심의분과위원으로 활동 중인 심영섭 경희사이버대 미디어영상홍보학과 겸임교수는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선정적인 일러스트는 성폭력 사건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무디게 만들 위험이 있다. 피해자를 강조하는 게 아니라 가해자가 왜 잘못했는지를 중점적으로 담은 이미지를 사용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지난 6월 4일부터 7월 16일까지 온라인 설문을 통해 ‘성폭력 사건 피해자에게 성적수치심을 요구하는 상황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했는지’ 조사한 결과.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지난 6월 4일부터 7월 16일까지 온라인 설문을 통해 ‘성폭력 사건 피해자에게 성적수치심을 요구하는 상황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했는지’ 조사한 결과.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

<조선일보>가 거센 역풍을 맞은 '조국 부녀 일러스트' 논란 당시에 "실수였다"고 해명한 것처럼 성범죄 보도에 배치되는 '선정적 일러스트'도 실수로 치부된다.   

26일 성추행 보도에 피해자다움을 강조한 일러스트를 사용한 한 언론사의 사회부장은 “성범죄 보도와 관련해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내부 가이드라인과 한국기자협회 등에서 마련한 권고 기준들을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간혹 예전에 사내에서 썼던 이미지나 계약을 맺고 있는 통신사 이미지를 그대로 쓰다가 선정적인 일러스트를 삽입하는 실수가 발생할 수 있는데, 그럴 때는 문제제기가 들어오면 곧바로 조치를 취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론이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이런 일러스트가 2차 피해를 안긴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피해자들은 피해자가 일률적 이미지로 그려지는 것, 수동적인 존재로 재현되는 것, 손상되고 파괴되는 사람으로 그려지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이 크다. 수치스러워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문제제기 하는 모습에 대해 ‘피해자가 맞느냐’고 의심하고, 이러한 ‘피해자다움’에 대한 상이 법적 판단에서 불이익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라며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분노하는 모습이나 ‘노(NO)’ 라고 대응하는 모습 등 다양한 모습을 일러스트에 담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윤여진 언론인권센터 상임이사도 “피해자의 수동적인 모습을 강조한 일러스트는 목소리를 내는 피해자로 하여금 피해자답지 않다고 여기게끔 만든다. 결국 우리 사회가 피해자의 피해를 복구하고, 피해자가 자기 목소리를 내는 데 걸림돌이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여성민우회 성폭력상담소가 지난 6월 4일부터 7월 16일까지 온라인 설문을 통해 ‘성폭력 사건 피해자에게 성적수치심을 요구하는 상황을 직접 경험하거나 목격했는지’ 조사한 결과, 응답자 503명 중 394명(약 78%)이 “뉴스 기사 등 언론에서 성폭력 사건을 이미지화할 때 피해자가 어두운 공간에 있거나, 움츠려 있거나, 고개 숙인 상황으로 묘사할 때 은연중에 성폭력 피해 경험은 ‘수치스러운’ 경험으로 인식하게 된다”고 답하기도 했다.

윤여진 상임이사는 “예전에도 그러한 일러스트를 써왔으니 문제없다는 식의 사고가 전환이 안 되고 있다”며 “기자는 아무 생각 없이 그러한 일러스트를 썼어도 피해자는 위축될 수 있다. 기사를 쓰는 데만 목적을 두지 말고, 해당 보도가 피해자들한테 어떤 영향을 미칠지, 피해자의 피해를 회복시키는 데 어떤 문제가 될 수 있을지, 기사를 접하는 사람들한테 어떤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을지 등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언론인들의 인권감수성과 성인지 감수성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