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격리의 시대, 제대로 쉬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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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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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박재철 CBS PD] 쉰다는 건 어떤 걸까? 우선, 쉼은 숨 돌릴 여유를 갖는 일일 테다. 가쁜 숨이 느리고 고른 숨으로 바뀔 수 있도록 스스로에게 짬을 주는 것. 물론 이것이 충분한 정의는 아니다.

밀접접촉자로 긴 격리 후에 복귀한 동료들에게서 제대로 쉬다 왔다는 인상을 받지 못한다. 뭔가 가시지 않는 피곤함의 흔적이 세이빙 크림처럼 얼굴 어딘가에 남아있다. 일에서 벗어나 갑자기 쉴 만한 공간과 시간을 얻었다고 그것이 곧 쉼의 질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쉼의 고수들은 우리 주위에 분명 있다. 시샘이 날 정도로 그들은 제대로 쉴 줄 안다. 고양이 걸음걸이 같은 리듬으로, 어느 늦봄 알맞게 누그러진 햇살을 닮은 그런 평온한 얼굴을 하고선,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부러울 뿐이다. 내 관찰로는 그 고수들은 대게 두 가지 유형이다.

첫 번째로 칩거형. 이들은 일찌감치 자발적으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해온 이들이다. 밖으로의 에너지 누수를 면밀히 찾아내 꽁꽁 밀봉하고선 오직 몰입의 즐거움 속에서 양질의 쉼을 얻는다.  ‘고립’이기보다는 ‘자립’에 가까운 삶의 방식을 선택한 자들. 작년에 출간된 <은둔 기계(김홍중 저)>는 이 유형의 해설서라 할 만하다.  

한마디로 이 책은 “괴물은 은둔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러니까 은둔은 인간을 괴물과 나누는 기준선이 된다. 나를 포함해 지금 세상에는 은둔을 모르는 괴물들로 가득 찬 셈. 

“은둔은 사회적인 것, 지배적인 것, 패권적인 것으로부터의 필사적 탈주다. 은신처를 확보하지 못한 자들은 사회의 격류를 비껴 흘려보낼 생존의 각도를 갖고 있지 않다.”

권력과 금력, 그 세속적 자장(磁場)에서 힘껏 달아나 멀리 도망쳐야 비로소 생존 각이 보인다는 뜻일 덴데, 저자는 그 은신처들을 이렇게 열거한다. 

“누구는 커피로 은둔하고, 누구는 음악으로, 누구는 산책으로, 누구는 철학으로 은둔한다. 성격으로, 질병으로, 작품으로, 광장에, 대중 속에 은둔하는 자들도 있다. 은둔지는 발명될 수 있다. 은둔지를 구축하는 능력이 참된 창조력이다.” 

발견이 아니라 발명의 영역. 은둔지는 나로 인해 창조되는 곳이다. 삶에서 무언가를 진정으로 감당해온 자들이라면 응당 가질 수 있는, 아니 꼭 가져야 하는 은둔지는 도피나 회피처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감당하는 자들은 대개 침묵한다. 감당에 몰두하여 표현하고 목소리를 낼 힘조차 갖지 못한다. 질병을 감당하는 사람들, 사랑을 감당하고, 부모의 역할을 감당하고, 직무를 감당하고, 존재 자체를 감당하는 자들, 이들의 힘으로 삶이 흘러간다. 자신에게 부과되는 것들을 잘 감당하는 존재자들은 드러나지 않는다. 중대한 삶의 빈곤은 재산이나 업적, 지위의 빈곤이 아니라 감당해본 일의 빈곤이다.”
   
은둔은 일종의 예우일지도 모른다. 제대로 감당하느라 부단히 애써온 사람들에 대한. 칼의 손잡이까지 칼날로 변해버린 삶의 위험성을 오직 ‘은둔’을 통해서라야 깨달을 수 있다는 지적일까? 열심히 감당해온 당신, 이제는 은둔하라!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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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쉼의 유형은 칩거와는 반대편에 있다. ‘빈둥거림’을 모토로 닫힌 감각의 문을 활짝 열어젖힘으로써 쉼을 얻는 사람들, 바로 외유형이다. 칩거가 번잡한 외부와의 차단에서 찾는 쉼이라면, 외유는 연결과 확장이다.사람이든 사건과 장소든 새로운 세계와 관계 맺고, 맞닥뜨린 우연을 기꺼이 껴안다. 예측 불가능성은 삶에 뜻밖의 서사를 제공한다. 그리고 밋밋한 텍스트에 재미와 의미를 불어넣는다.  

영화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주인공이 그 예다. 그는 먹기 위해 이탈리아로, 기도하기 위해 인도로 그리고 사랑하기 위해 발리로 이동한다. 아니 정확히는 그곳에서 우연히도 제대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게 된다. 마치 구도 행위를 하듯 참된 쉼을 찾아 길 위에 선다. 

경제적 안락과 타인의 인정 추구는 자신의 삶을 어느 순간 역할극으로 변질시켰고, 그를 무료와 권태 속에 허덕이게 했다는 깨달음. 이제는 그 반대방향에서 안식을 찾고자 마음먹는다. 이탈리아로 인도로 발리로 떠돌지만 수렴되는 곳은 하나다. 닫힌 문을 활짝 여는 일. 그는 감각의 빗장부터 걷어낸다.
  
인간의 오감은 원래부터 외부를 향해 열려있다. 눈과 귀, 코와 입, 그리고 피부는 모두 세상을 향해 있다. 그 개폐는 온전히 자신의 몫. 이곳으로 좋은 것들이 유입되면 마음은 이 상황을 행복으로 해석한다. 쉼은 이런 행복 속에서 싹튼다. 맛있는 것을 먹고, 좋은 것을 듣고 바라보며, 향기와 감촉을 직접 경험해보는 것, 그는 오감 만족을 통한 향유의 쉼에 눈뜬다.    
꼭꼭 닫아둔 감각의 문을 활짝 열듯이 자신을 옭아맨 것들로부터 하나 둘 벗어나면서 영성과 사랑의 문도 힘차게 두 손으로 밀어 젖힌다.  이로써 ‘먹고’에 이어 그는 온전히 ‘기도하고’ ‘사랑하’게 된다.한 손에는 “Dolce far niente(달콤한 게으름)” 다른 손에는 “Attraversiamo (우리 함께 건너가자)” 이 두 개의 계명을 들고선 외유형 쉼의 달인의 면모를 영화 내내 보여준다. 

사실, 우리 모두는 쉬고 싶다. 아니 ‘제대로’ 쉬고 싶다. 나태와 망각이 쉼과 동일어가 아님을 우린 알고 있다. 집에서 종일 뒹군다고, 머리 아픈 일을 잠시 잊는다고 쉼을 찾았다 자족할 수 있을까. 잘 쉬는 것에도 학습과 연습이 뒤따라야 한다. 결국 나에게 맞는 쉼이 필요하다. 

칩거하는 자든 외유하는 자든, 쉼의 천재들은 종국에는 자유로운 자들이 아닐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을 때에,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하는 이들. 

그들은 ‘니 맘대로’의 일상에 얽매이지 않고, ‘내 맘대로’의 일탈로 오늘도 유유히 걸어 나간다. 어쩌면 그렇게 찾아 헤매는 쉼은 몸과 맘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울 때에 깃털처럼 소리 없이 우리 곁에 내려앉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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