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인의 정치화, 정치의 예술화
상태바
예술인의 정치화, 정치의 예술화
[라디오 큐시트]
  • 박재철 CBS PD
  • 승인 2022.03.21 1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라디오 부스 ⓒ픽사베이
라디오 부스 ⓒ픽사베이

[PD저널=박재철 CBS PD]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맨홀 같던 대선이 끝났다. 극적인 표 차이 만큼이나 비호감도에서도 우열을 가리기 힘든 선거였다는 평이 많다. 이번 대선이 유독 기억되는 건 후보 선택의 어려움 때문만이 아니다. 거기에 상황 판단의 복잡함이 돌발적으로 더해졌다. 

소속 방송사의 한 진행자가 대선 후보 지지 선언 명단에 공개적으로 이름을 올렸다. 투표일이 다가올수록 둔각이던 대립각이 예각이 되면서 여기저기서 갈등이 첨예해지는 시기였다. 딱히 강제하는 사내 규정도, 개인의 의사표현의 자유를 막을 수단도 없었다. 그렇다고 다수 청취자의 성향에 반할 수 있는 일을 묵과하기도 어려웠다. 

기사를 찾아보니 양측 문화예술인이 1만 6천여 명이나 지지선언을 한 상태. 덮고 가든, 외화하든 이 문제에 대해서 나름의 고민이 필요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 논란이 우리 사회를 한차례 휩쓸고 지나간 터라, 이번 문화예술인들의 지지선언에는 절박하고 실존적인 측면이 있긴 했다. 본인으로서도 취향이나 기호만으로 자신의 이름을 공개하지는 않았을 터다.

이런 문제와 연관해 기계적으로 나오는 반응은 ‘공인 논리’다. “공인으로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인데, 영향력이나 지명도 면에서 문화예술인을 ‘공인’이라 칭할 수 있겠으나 엄밀히 따져 공적인 업무를 하는 ‘공인’으로 볼 것이냐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오히려 “한사람의 시민으로서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표출하는 게 무슨 죄냐?”라는 항변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그러므로 프로그램 진행자가 스스로 자신의 당파성을 내비치는 일은 보기에 따라서 크게 문제될 소지가 없다. 다만, 청취자들도 그렇게 받아들여 줄지는 미지수. 

거기까지 정리가 됐건만, 가슴 한편에 가시지 않은 찝찝함이 있었다. 그건 문화예술인의 지지 선언을 둘러싸고 그간 경험칙으로 잔존해온 이미지에 기인했다. 그들이 누구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정치적 행위 자체보다는, 대중에게 표출되는 메시지나 콘텐츠가 너무 날것이고 거칠었기에 생긴 반감 때문이었다. 

우리가 사랑하고 아꼈던 문화예술인이 그동안 작품을 통해 보여줬던 미적 성취나 감동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그들의 표현 수위와 수준이 문제였다. 작품의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상식 수준에도 못 미치는 내용과 형식으로 대중에게 지지를 호소하는 말과 글을 마구 쏟아낼 때 실망감을 감추기 힘들었던 건 나뿐일까?

원로 문인이 혐오를 부추기는 글을 버젓이 게재하고 상대 후보를 ‘외눈박이 괴인’으로 명명하거나, 대표적인 민중가수가 성형을 조롱하는 노랫말로 후보 아내를 희화하거나, 많은 이들이 암송하는 시를 쓰는 시인이 저잣거리의 언어로 맞은편 진영을 흠집 낼 때, 그들이 어렵게 쌓아올린 예술세계 어느 한부분이 ‘쿵’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단순히 명단에 이름을 올리든, 적극적인 선거와 지지 운동을 하든 문화예술인의 정치화는 앞으로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또한 더 이상 터부시할 문제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를 예술화하는 방향에 그들의 행보가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들의 말과 글이, 노래와 퍼포먼스가 우리가 애정하고 흠모했던 그들의 작품 수준에 값하는 것이길 바라본다. 

그것이 그들의 언어에 기대 엄혹한 시대를 힘겹게 건너왔거나 그들의 노래와 연기에 힘입어 남몰래 용기와 희망을 키워왔던 이름 모를 독자나 청중들에게 그들이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이를테면, 대통령을 향한 한 배우의 발언처럼.

“이 나라에서 가장 존경 받는 자리에 앉겠다고 주장한 사람이 장애가 있는 기자를 흉내 냈던 순간이 있었다. 공적인 자리에 있는 사람, 강력한 사람이 굴욕감을 주려는 본능을 드러내면, 그건 모든 사람의 삶에 스며든다.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해도 된다는 허가를 주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무례는 무례를 부른다. 폭력은 폭력을 조장한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면 우리 모두가 패배한다.” ㅡ<메릴 스트립의 골든글러브 수상 연설 중에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