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는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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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는 라디오
[라디오 큐시트]
  • 박재철 CBS PD
  • 승인 2022.04.14 14: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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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부스 ⓒ픽사베이
라디오 부스 ⓒ픽사베이

[PD저널=박재철 CBS PD] “나를 모르는 사람에게 털어놓는 게 편할 때가 있죠.” 여기서 ‘나를 모르는 사람’은 라디오다. 라디오에 속내를 고백하고 마음을 편하게 하는 것, 그것이 라디오의 존재 이유라고 말한다.

최근 종영한 JTBC <다수의 수다>에 출연한 세 명 디제이(배철수, 이금희, 김이나)가 낸 한목소리다. <다수의 수다>는 다양한 직업 세계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토크 프로그램이다. 의사, 법조인, 기자 등의 전문직은 물론, 택배기사, 사육사, 학원 강사, 종교인 등 출연진의 스펙트럼도 꽤 넓다. 얼마 전 라디오 디제이 편이 있었다. 

라디오의 매력을 묻는 질문에 출연진 모두 역시 비슷한 답을 했다. ‘거창하지 않아도 함께 있는 느낌, 그게 라디오인 것 같아요’ 신호대기 옆 차에서 자신과 같은 음악을 들으며 박자 맞추는 모습을 우연히 확인할 때, 심야에 “이 방송을 듣고 계신 분, 잠시 형광등을 껐다 켜보세요”라는 주문에 생각지도 못한 수의 아파트 창문이 동시에 소등과 점등이 됐던 때, 그럴 때 찾아오는 “아, 지금 나 혼자가 아니구나!” 이런 구체적인 실감을 주는 매체가 라디오라는 것. 

‘개봉동에 지금 비가 옵니다’ 문자에 ‘우산 잘 쓰세요~’, ‘첫 월급 받았어요’에는 ‘축하해요~’라고 디제이가 짧게 답해도 “세상 어디에선가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듣고 있구나!” 살가운 공감을 자아내는 것 또한 라디오만의 고유 능력이라고 평가한다. “그렇지, 맞아, 라디오는 그런 면이 있지….” 방송을 보면서 연신 고개가 끄덕여졌다. 

음악이든 뉴스든 시사든 교양이든 라디오에 주파수를 맞추는 마음의 큰 부분은 결국 ‘함께 있는 느낌’을 갖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복잡다단한 세상일에도, 실직과 실연과 같은 개인사에도, 동참과 동행의 대상으로서 라디오는 그리 나쁘지 않다. 편하게 만만하게 고백하고픈 상대가 되어준다. 
 
라디오는 어떤 고백의 유형과 어울릴까? 친구의 아내를 향한 연정을 흰 도화지에 담아 한 장 한 장 전달하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의 한 장면 같은 ‘낭만형’일까? 흠모하는 남자의 아이를 병으로 잃고 그간의 일들을 긴 편지에 담아 자살 직전에 보내는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 ‘낯선 여인의 편지’ 속 주인공의 처지를 닮은 ‘절망형’?

아니면 세상사 자신이 저지른 크고 작은 죄의 무게에서 벗어나 누군가로부터 죄사함의 평온을 얻고 싶어 하는 ‘고해 성사형’?  단 한 번의 고백으로 영원의 시간 속에 비밀을 꼭꼭 묻어버리고픈 화양연화의 양조위가 앙코르 와트 사원 벽에 대고 그렇게 했듯이 그런 ‘밀봉형’에 가까울까?

한가지라기보다는 그 모든 것이 라디오일 것이다. 시시콜콜한 우리네 삶, 그 희노애락의 순간순간에 라디오는 함께 해온 오랜 이력이 있는 레거시 미디어이기에. 삶의 한 자락이 속절없이 구겨질 때나, 화사하게 개화하는 벚꽃 같은 인연이 찾아 올 때나 무언가를 툭 터놓기 편한 상대로서 라디오만 한 게, 그렇게 만만한 게 또 어디 있을까 싶다.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까, 나만 그런가 하다가
오늘은 살짝 울기도 했는데, 오후쯤엔가 흘러나오는 노래를 
무심코 따라 부르는 저 자신을 보고 웃었네요.
너무 사소해서 친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이런 감정,
여기에 남겨봅니다.”  

 -2022년 4월 12일 9891번 쓰시는 분의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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