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맨에서 아이언맨으로, 미국 자아상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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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에서 아이언맨으로, 미국 자아상의 변화
[히어로도 악당도 없는 세상 ①]
  • 박정욱 MBC PD
  • 승인 2022.04.15 15: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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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개봉한 영화 '아이언맨1' 스틸컷.
2008년 개봉한 영화 '아이언맨1' 스틸컷.

[PD저널=박정욱 MBC PD] ‘슈퍼맨’은 오랫동안 미국을 상징하는 슈퍼히어로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누구도 견줄 수 없는 슈퍼파워를 운명적으로 지니고 있었기에 딱히 힘을 가지기 위해 노력을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절대 그 능력을 자기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다. 무너지는 다리에서 떨어지는 자동차를 낚아채고, 화재가 난 빌딩에서 시민들을 구하며, 도시를 위협하는 악당들을 물리친다. 재난 구조, 화재 진압, 범죄자 체포... 대체로 공무원들이 하는 일이다. 그걸 보수 한 푼 받지 않고 부지런히 해낼 만큼 슈퍼맨은 도덕적인 캐릭터다.

다들 아는 것처럼, 슈퍼맨은 오랫동안 미국인들이 자기 나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셀프 이미지였다. ‘신에 의해 인류를 올바르게 이끌 사명을 지니고 태어난 운명적 초강대국’이란 담론은 미국의 보수 개신교 사회에서 흔히 회자되는 담론이었다.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미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미국이 세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수호자라고 여겼다. 공무원 이미지의 슈퍼맨처럼 미국에게 붙은 별명도 ‘세계의 경찰’이었다.

그런데 변화가 생겼다. 나는 그 시점을 2008년 5월 미국에서 영화 <아이언맨>이 개봉한 때로 본다. 극 중 주인공인 토니 스타크는 슈퍼히어로 역사상 처음으로 돈을 벌어서 슈퍼파워를 ‘만든’ 캐릭터다. 억만장자 슈퍼히어로로는 DC의 배트맨도 있지만 그는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아서 쓸 뿐이다.

토니 스타크는 이와 다르다. 그는 군수산업체인 ‘스타크 인더스트리’를 물려받아 직접 경영하고 돈을 번다. 그렇게 번 돈과 첨단 기술을 결합해 아이언맨 수트를 만들어 입고 슈퍼히어로가 된다. 슈퍼히어로로 변신한 이후에도 스타크 인더스트리는 계속 무기를 판매한다.

마블 원작에 따르면, 스타크 인더스트리는 현재의 구글이나 애플보다 훨씬 큰 지배적 기업이다. 게다가 토니 스타크는 단순히 최대 주주나 최고경영자가 아니라 회사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기술자이다. 돈과 첨단 기술이 결합해야 존재할 수 있는 슈퍼히어로가 바로 아이언맨인 셈이다.

영화 <아이언맨>이 개봉한 2008년은 부시 대통령 2기 후반이다. ‘테러와의 전쟁’을 일으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엄청난 세금이 중동의 전쟁터로 빨려들어갔음에도 전쟁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이슬람 테러리즘으로부터 미국과 세계를 구하겠다’는 거창한 사명을 내걸었지만, 정작 미국인들은 계산기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왜 우리가 피 흘리고 돈을 써가면서 아프간과 이라크의 자유와 번영을 위해 애써야 하는가?” 이것이 부시와 네오콘의 8년 집권을 거치면서 미국인들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리고 그 때 마침 개봉한 영화가 <아이언맨 1>이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이며 돈을 밝히지만, 그렇게 번 돈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캐릭터인 아이언맨에게 미국인들은 열광했다. 슈퍼맨처럼 타고난 능력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남을 돕는 이타적 존재가 아니라, 남을 돕기 위해 돈과 기술이 필요하다는 걸 숨기지 않고 드러낸 슈퍼히어로이기 때문이다. 돈과 기술, 미국이 패권국으로 남기 위해 가장 필요한 두 가지가 아닌가. 

2008년 11월에 미국에서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됐다. 그리고 ‘이라크와 아프간에서 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공언한 버락 오바마가 당선됐다. 슈퍼맨의 시대가 지고, 아이언맨의 시대가 시작된 순간이다.

'어벤져스:엔드게임'  스틸컷.
'어벤져스:엔드게임' 스틸컷.

지난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는 화들짝 놀랐다. 갑자기 국제정세가 요동쳤다. 미국은 공격을 당하는 우크라이나에게 무기와 필요한 물자를 지원했다. 하지만 미군이 전쟁에 직접 개입하는 것은 거부했다.

러시아 침공 후 한 달쯤 지난 3월 24일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한 한 여론조사 결과가 눈길을 끈다. 미국 통신사 AP가 여론조사기관 NORC와 공동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미국인 응답자 중 40%는 "미국은 러-우크라 전쟁에서 적극적 역할(major role)을 해야한다"고 답했다. 반면 46%는 "소극적 역할(minor role)에 머물러야 한다"고 응답했다. 심지어 "아무런 역할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응답자도 13%나 됐다.

같은 날 NPR과 입소스가 공동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미국은 우크라에 지원을 해주어야 하지만, 러시아와의 군사적 충돌을 피하기 위해서 지원은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응답이 62%인 반면, ”미국은 러시아와의 충돌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우크라이나가 원하는 모든 것을 지원해줘야 한다“는 응답은 21%에 머물렀다. 미국인들은 침공을 당한 우크라이나를 ‘소극적’이고 ‘제한적’으로 돕고자 한다. 토니 스타크처럼 계산을 하는 것이다.

최근 마블 ‘어벤져스 시리즈’의 하락세가 뚜렷하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아이언맨이 <어벤져스:엔드게임>에서 사망하면서 시리즈에서 이탈한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미국인의 자아상이 사라졌으니 미국인들이 어벤져스 시리즈에 감정을 이입하기가 한결 더 어려워진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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