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무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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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무관심
[라디오 큐시트]
  • 박재철 CBS PD
  • 승인 2022.04.28 12: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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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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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박재철 CBS PD] 제작하고 있는 프로그램에서 임상심리학자 한 분을 모시고 이야기를 들었다. 김태경 교수는 범죄 피해자와 그 유족들의 재활과 정신적 자립을 돕는다. 최근에 상담 내용을 토대로 책도 냈는데 제목이 인상 깊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 우리 사회가 피해자에게 가하는 유무형의 용서 강권 문화를 비판하는 제목이라고 한다. 용서의 권리 주체는 피해자인데도 그 사실이 자주 잊힌다는 목소리다. 

“이쯤 하면 됐다, 그만해”, “더 이상의 갈등은 무의미해, 이제 화해해” 이런 이야기들은 그 선의에도 불구하고 용서를 하는 이가 누구인지를 불분명하게 만든다. ‘되고, 안되고’ 혹은 ‘의미가 있고 없고’는 누가 결정해야 하는가? 피해자는 그냥 이런 분위기에 떠밀려 최종 승인하는 당사자일 뿐인가? 미온적인 봉합이나 비자발적인 화해는 결국 피해자가 아닌 주위 사람들이 마음 편하자고 부추기는 본인 안도용은 아닌가? 유족에게 건네는 위로의 말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저는 살인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지 3년이 되어 갑니다. 제가 힘들 때마다 ‘잊어, 산 사람은 살아야지’, ‘그만 울고, 이제 웃어’라고 재촉하던 주변 사람이 막상 제가 웃으니까 뒤에서 욕을 해요. 그렇게 남편을 보내고도 좋다며 웃는다고.” 

상담을 받는 이 유족은 가끔 웃어도 되는지를 진지하게 김 교수에게 물었다고 한다. “내 탓이다” 본인을 향한 격한 자책이 차츰 사그라들어도 적절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렇게 주변에서 마구 틈입하는 연민과 동정이 이어지다 보면 피해자나 유족은 삶에 대한 자기 결정권을 심하게 훼손당한다. 

일상 장악력이 약해지면 곧바로 무기력증과 우울증이 동반된다. 그렇다면 크나큰 상실감을 겪는 이를 위해 주변인은 어떤 말을 해야 할까? 김 교수는 단언한다.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임상심리학자 김태경 교수가 쓴 '용서하지 않을 권리'.
임상심리학자 김태경 교수가 쓴 '용서하지 않을 권리'.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것이 예의라고 말한다. 본인이 안다고 생각하고 건네는 말들은 대개 얼마나 몰랐는지를 드러낼 뿐이다. 발언권을 얻으려는 듯 “나도 겪어봐서 아는데”로 시작하는 대개의 말들은 나중에는 모서리가 뾰족해져서 피해자나 유족의 마음을 품어주기보다는 깊은 생채기를 낸다.

그래서 김 교수는 ‘말하기’ 대신 ‘기다림’이 가능한지를 되묻는다. 상대방이 말문을 열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기다려줄 수 있냐는 것이다. 결국, 위로와 공감은 피해자나 유족이 필요할 때 하는 것이지, 주변인이 필요해서 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타인의 감정, 처지, 입장의 이해 불가능성을 겸허하게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말과 행동은 폭력의 경계선을 너무 쉽게 넘는다고 경고한다. 

“따뜻한 무관심” 스튜디오 부스 밖에서 김 교수의 인터뷰를 바라보면서 떠오른 용어다. 역설적이지만 맞춤하지 않나 싶다. 무심한 듯 적당한 거리에서 상대방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도움의 때와 방식을 지속적으로 고민하는 것이 가장 세련된 배려가 아닐까. 

절망과 고통은 순서가 있을 뿐 예외는 없다고 한다. 각자가 감당해야 할 몫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중압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것은 의외로 작은 것들이라고 김 교수는 덧붙인다. 

사건 사고 현장에서 누군가가 말없이 건네는 미지근한 물 한잔, “이제 당신은 안전합니다”라는 출동 경찰의 한마디, 호기심에 찬 구경꾼의 시선으로부터 옷으로 가림막을 해주는 일, 주위로부터 배려와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 그 구체적인 감각을 잃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회복력을 가진 존재라고 한다. 가해자의 잔혹성이나 자극적인 범죄 동기 만을 쫓아 그것을 경쟁적으로 부각시키다 보면 피해자는 가시권에서 벗어나 있기 일쑤다. 

카메라나 펜의 프레임 바깥에 놓인 대상을 그 안쪽으로 옮겨놓는 일, 들리지 않았던 목소리, 보이지 않았던 그림자에 눈과 귀를 여는 일, “나는 지금 조금이나마 그런 일을 하고 있나?” 한 임상 심리학자의 말을 경청하면서 조용히 자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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