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활용 신화의 이면
상태바
재활용 신화의 이면
[비필독도서 53] '당신의 쓰레기는 재활용되지 않았다'
  • 오학준 SBS PD
  • 승인 2022.05.06 15: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PD저널=오학준 SBS PD] 신혼 가구들을 들이기 위해 오랜만에 방을 정리하니 안 입는 옷들이 꽤 쌓여 있었다. 옷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 그리 많은 돈을 쓰지 않았는데도, 시간이 흐르니 처리하기 난감한 양의 옷들이 쌓였다. 나누거나 물려줄 사람도 없어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상태가 괜찮은 옷들만 모아 집 앞에 놓인 의류 수거함에 밀어 넣었다. 이 옷이 필요한 사람이 어딘가, 누군가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은 입지 않을 옷들을 쌓아두었단 죄책감을 줄여줬다. 한동안 그 사실을 잊을 정도로.

글을 쓰기 위해 친구가 만든 다큐멘터리를 다시 찬찬히 돌려보면서 막연한 믿음으로 덮어두었던 불편한 감정들이 스멀스멀 고개를 들었다. <옷을 위한 지구는 없다>에서 취재한 케냐와 방글라데시의 풍경은 재활용이라는 ‘신화’의 허망함을 직시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수거함 속으로 밀어 넣은 옷들이 사실은 우아하게 버려진 쓰레기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죄책감을 덜기 위해 막연한 믿음에 적극적으로 매달렸던 건 아닌지 스스로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미카엘라 르 뫼르의 <당신의 쓰레기는 재활용되지 않았다>는 다큐멘터리와 곁들여 보기에 좋은 소책자다. 베트남 하노이 외곽의 민 카이 마을을 수년간 취재한 저자는 전 세계 선진국 국민이 덜어낸 죄책감과 책임감이 한 가난한 마을의 환경과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체계적으로 파괴하고 있는지를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전한다. 그저 눈앞에서 쓰레기를 치우는 행위를 ‘재활용’이라는 이름을 붙여 지구를 살리는 행동으로 둔갑시키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구조적으로 착취당하는 이들의 피폐한 삶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미카엘라 르 뫼르의 '당신의 쓰레기는 재활용되지 않았다'
미카엘라 르 뫼르의 '당신의 쓰레기는 재활용되지 않았다'

저자는 2011년부터 7년간 연구의 바탕이 될 지역조사를 위해 베트남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자원 재활용 시설에 의존하는 동네 사람들의 삶을 취재했다. 민 카이 마을은 수십 년간 세계 무역으로 발생한 플라스틱을 재활용하는 데 특화된 곳이었다.

매일 이곳으로 들어오는 천 톤가량의 쓰레기를 해체하기 위해 수만 명의 사람이 달라붙는다. 재활용 시설이 마을에 들어오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은 자연에 의존해 생계를 꾸렸지만, 이제 대부분은 저임금 노동자가 되어 공장과 그 주변에서 일한다. 녹색의 재활용 로고가 풍기는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분류 과정은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삶과 신체, 그리고 주변 환경을 망친다.

마을에 들어온 쓰레기들의 대부분은 길거리에 방치된다. 재활용 ‘원료’라고 불린 쓰레기 더미 가운데 쓸만한 것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선진국들이 국경 바깥으로 내버리는 공장과 쓰레기를 받아들인 대가로 벌어들인 돈은, 마을 사람들에게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그마저도 이주 노동자와 여성이 담당하는 수작업의 대가는 더욱 볼품없다. 유해물과 가장 가까이 붙어 일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 일을 통해 벌어들이는 돈으로 자기 삶의 환경을 바꿀 가능성은 별로 없다.

또 다른 문제는, 이들이 가공한 원료의 품질이 그리 좋을 수 없다는 점이다. 선진국들의 제한적인 수입 기준을 통과하는 경우는 드물다. 원료의 품질뿐만 아니라 시설 역시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한 경우들이 많다. 저자의 말마따나 “민 카이에서 재활용된 플라스틱 봉투가 국경을 넘을 일은 거의 없다. 발송인에게 다시 돌아가는 일은 드물다는 뜻이다.” 선진국을 떠난 쓰레기와 책임감은 개발도상국의 풍경에 계속해서 남아있다. 재활용이 가져다주는 뿌듯함의 이면이다.

영민하게 사업자로 변신한 사람들은 정치인과 결탁했다. 재활용 규제는 완화되었고, 동네의 이익은 몇몇 부유한 사람들의 뜻대로 분배되었다. 자신의 사업이 마을 사람들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했고, 일자리를 주어 행복한 삶을 살게 했다고 주장하지만, 그 말을 하는 이들마저 성공하면 민 카이 마을에서 살지 않았다. 오염된 강물과 멀리 떨어진 곳에 저택을 짓고, 집사와 하인을 부리는 삶을 살았다.

환경 오염의 부담은 오롯이 남은 주민들의 몫이었지만, 이를 해결해야 할 권한이 있는 지역 정치인들은 사업자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공장에서 무단으로 방출하는 오수는 그들의 눈에 보이지 않았다. 민주주의는 사라졌고, 불평등은 강화되었다. 이것이 저자가 관찰한 ‘재활용’ 신화의 이면이었다.

이것은 몇몇 개인의 부도덕함으로 만들어진 문제가 아니다. 대량으로 만들어야 비용이 줄고, 끊임없이 소비를 자극해야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시스템 아래에선 생산과 소비는 서로를 자극하며 쓰레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낸다. 매일 새로운 음식을 진열하기 위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음식도 계속 폐기하는 아이러니함을 견디기 위해선 이 쓰레기들이 어디선가는 재활용될 수 있다는 ‘연금술’스러운 믿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도에 없는 듯한 이 ‘어딘가’는 결국 베트남, 케냐, 방글라데시 마을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눈앞에 나뒹구는 비닐봉지와 수거함에서 흘러나온 옷가지들은 우리와 그들의 연결 고리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재활용이 무의미한 행동이라는 것은 아니지만, 재활용을 개인적 차원 너머의 문제로 받아들여야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재활용은 만능이 아니며 소비와 생산을 지금처럼 유지할 수는 없단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생분해 플라스틱이나, 더 정교한 재활용 기술은 과잉 생산과 과잉소비 자체를 건드리지 않는 대증요법에 가깝다. 쓰레기 재활용의 국제 연쇄 아래에 놓인 불평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정치적 고려도 필요하다는 사실을 회피할 수 없다. 귀찮고 괴로운 일임이 분명하지만, 손 놓고 앉아 있을 만큼 시간적인 여유가 있지도 않다.

만약 생산과 소비를 줄여야 한다면 얼마나 더 줄여야 할까? 검소한 삶을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 과정에서 감수해야 할 고통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평등하게 배분될까? 근본적인 대책이 아닌 대증요법도 병행할 수밖에 없다면, 어떤 실현 가능한 대안이 있을까?

이 얇은 책에서 저자는 대안이나 구체적인 대응 방안들을 말하지 않는다. ‘신화’를 깨는 데 집중할 뿐이다. 깨어진 믿음의 자리에 독자의 몫으로 남겨져 있는 질문의 무게가 무겁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