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이니와 푸틴의 평행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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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이니와 푸틴의 평행우주
[히어로도 악당도 없는 세상 2] 지도자에게 명예란
  • 박정욱 MBC PD
  • 승인 2022.05.13 16: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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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9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제77주년(전승절) 기념 열병식에 참석해 퍼레이드를 지켜보고 있다.©모스크바=AP/뉴시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9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제77주년(전승절) 기념 열병식에 참석해 퍼레이드를 지켜보고 있다.©모스크바=AP/뉴시스

[PD저널=박정욱 MBC PD] 미안하지만, ‘이란-이라크 전쟁’을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최소한 중년이다. 이 전쟁은 1980년에 시작해 8년간 지속됐다. 좀더 중동 정세를 아는 분이라면 이 전쟁이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전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시아파 맹주 이란과 수니파의 대표를 꿈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의 싸움은 이슬람 역사에서 그 유서가 깊다.

사실 이란-이라크 전쟁은 8년간이나 지속될 이유가 없었다. 이라크가 이란을 침략했는데 이란이 이를 잘 막아냈고 결국 1년 8개월만에 침략자 이라크군은 물러났다. 1년 8개월만에 끝날 전쟁이 8년간이나 이어진 건 이란의 최고지도자 ‘대아야톨라’ 호메이니 때문이다.

팔라비 왕정의 독재에 대해 시퍼렇게 날이 선 비판을 가했던 시아파 이슬람 성직자 호메이니는 이란 민중들에게 영웅이었다. 1979년 이란에서 팔라비 왕정을 무너뜨린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후 호메이니가 권력을 장악했는데 그는 이란의 군 장교들 가운데 팔라비 국왕에게 충성하는 이들이 많다고 의심해 군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자연스레 이란군의 전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이웃나라 이라크의 통치자인 사담 후세인은 전격적으로 이란을 침공했다. 사담은 군대가 약화된 이란을 제압해 접경지대인 샤트알아랍 강의 영유권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하지만 침략을 당한 이란은 초반 3개월간 고전하다가 이후 전세를 역전시켜 오히려 침략군을 몰아세워 개전 20개월만에 이라크군을 물리쳤다. 그럼 여기서 협정을 체결하고 전쟁을 끝내는 게 타당했다.

하지만 이란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자임하고 있던 호메이니는 “사악한 사담 후세인 정권을 몰아내고 이라크에 있는 시아파 성지 카르발라를 해방시키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선포하고는 이란군과 혁명수비대에게 국경을 넘어 이라크 영토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혁명 정부의 최고지도자가 우주 최강의 권위인 신의 계시를 빌려 진군을 명령했으니 이란 내에서 누구도 이에 반박할 수 없었다.

이제 이란군은 자신의 홈그라운드를 떠나 낯선 이라크 땅에 군홧발을 디딜 수밖에 없었다. 공격과 수비가 뒤바뀌었다. 당연히 이라크 땅에서는 이라크군이 홈 어드밴티지를 누린다. 그만큼 전세는 이라크에게 유리해졌고 이란군은 커다란 희생을 치러야 했다. 하지만 최고지도자 호메이니는 후퇴를 명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사담 정권을 무너뜨리고 시아파 성지를 해방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공개 선언해버렸기 때문이다.

만일 호메이니가 이란군에게 철수하라고 명한다면 둘 중의 하나가 된다. 신의 뜻을 어긴 것이거나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거나. 호메이니는 어느 쪽도 택할 수 없었다. 그는 최고지도자의 권위가 다치는 것보다 차라리 수십만명의 젊은이들이 이라크 땅에서 죽어나가는 것이 더 낫다고 여겼다. 

2020년 1월 4일(현지시간) 미 인디애나주 포트웨인의 앨런 카운티 법원 앞에서 포트웨인 평화주의 운동가들이 전쟁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포트웨인=AP/뉴시스
2020년 1월 4일(현지시간) 미 인디애나주 포트웨인의 앨런 카운티 법원 앞에서 포트웨인 평화주의 운동가들이 전쟁 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다. ©포트웨인=AP/뉴시스

아무런 전망도 없이 전쟁은 8년 동안이나 질질 끌다가 결국 1988년 8월 휴전에 돌입했다. ‘하나님의 대리인’처럼 굴던 호메이니의 위신도 땅에 떨어졌다. 호메이니는 휴전 협정 후 1년이 채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 아마 망신을 당한 스트레스가 건강을 해쳤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고통은 그보다 훨씬 더 컸다. 이란 국민 수백만 명이 죽거나 다쳤고 경제는 엉망이 되었다.

독자 여러분은 지도자의 권위를 위해 죽어가야 했던 국민들의 이야기를 접하면서 데자뷰를 느끼시는지? 지금까지 1980년대 이란의 호메이니가 이라크를 상대로 벌인 이야기였다. 21세기 러시아의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벌이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침략을 당한 우크라이나인들의 희생은 너무나 가슴 아프지만, 푸틴의 명령에 의해 전쟁터로 내몰린 러시아의 젊은이들이 흘리는 피도 안타깝다. 호메이니가 이란인들에게 영웅이었던 것처럼 푸틴 역시 한때는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이 망친 러시아의 경제와 강대국 지위를 되살린 영웅 대접을 받아왔다. 푸틴이 호메이니보다는 현명해지기를. 국민이 흘리는 피는 지도자의 명예보다 가벼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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