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블루스', 지역성 담은 K’드라마의 탄생, 또는 아비 없는 세상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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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블루스', 지역성 담은 K’드라마의 탄생, 또는 아비 없는 세상의 기록
[홍경수의 방송 인문학 ④] tvN 토일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 홍경수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 승인 2022.05.26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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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게임>의 성공으로 한국 영상시장이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콘텐츠 시장은 누가 독창적이고 매력적인 킬러콘텐츠를 만드느냐에 따라 '빅 머니'가 결정되는 게임장이다. 독창적인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시대에 창의적인 콘텐츠를 분석하는 작업도 의미가 적지 않다. 방송 콘텐츠 전문가인 홍경수 아주대 교수가 2~3주에 한 번 꼴로 인문학적 관점으로 콘텐츠를 분석·비평한다. -편집자 주
tvN 토일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포스터.
tvN 토일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포스터.

[PD저널=홍경수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이추룩 새벽부터 나오지 맙서 어머니들은”, “우리 정옥이가 무사?..... 우리는 경하기로 해쩌” 제주를 배경으로 출연자 상당수가 제주어를 사용하는 담대한 드라마가 방송 중이다. 대본 노희경-연출 김규태 조합이라 해도 드라마를 기획할 때, 제주어를 어느 정도 수준으로 담아낼지 고민이 적지 않았을 듯싶다. 드라마는 예상을 뛰어넘어 자막이 아니면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려운 제주어까지 담아냈다.

OTT에서 제공하는 자막에 익숙해서인지 제주어 자막이 어색하지 않았다. 이렇게 과단성 있는 방송언어를 연출한 데에는 제주도가 갖고 있는 매력자본이 작용했을 것이다. 한국인들 대다수는 제주도에 큰 호감을 가지고 있고, 2021년에 제주를 방문한 사람 숫자만 1200만 명에 달했다. 1년간 국민 약 네 명 중 한 명꼴로 방문했고, 방문하지 않은 사람들도 언제든지 가보고 싶은 핫플레이스가 제주다. 제주에 대한 호감이 자막이 필요할 수준의 제주어에 대한 저항을 낮추었지만, 연출자와 작가가 제주인의 삶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블루스>는 한국 드라마의 지역적·언어적 다양성을 확장시킨 사건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이는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 전봉준(최무성)이 표준어를 쓴 것과 대조를 이룬다. 전봉준이 호남의 고유어를 사용하는 것을 두고 연출자와 작가는 대립했으며, 결국 ‘전달력’이라는 목적을 위해 전봉준의 언어는 무참히 훼손되고 말았다. 작가는 전봉준을 전국구 인물로 부각시키고 싶었고, 전봉준까지 전라도말을 쓰면 시청자들이 보기에 사투리의 과잉으로 느낄 수 있다고 주장했다(홍경수 논문, 전봉준은 왜 표준어를 사용했나? 중). <녹두꽃>이 표준어 구사로 좀 더 큰 전달력을 얻었을지 몰라도, 호남 고유어로 동학혁명을 이끌었던 전봉준의 형형한 눈빛과 서슬 퍼런 영혼은 담아내지 못했다.    

<우리들의 블루스>는 한류가 고도화되면서 이제 서울로 대표된 한국 사회 이야기가 세분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다. 뭉뚱그린 한국을 그린 K드라마와 대비하여, 지역성을 반영하는 드라마를 K’ 드라마로 이름 붙여 본다. 드라마에서 지역성을 담보하는 것은 의무여서가 아니라, 노출되지 않은 새로운 서사의 맛을 담보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OTT 시대가 보편적 이야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배경에 기반을 둔 보편성을 요구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들의 블루스' 현장포토.
'우리들의 블루스' 현장포토.

배우도 크리에이터가 될 수 있을까? 

노희경 작가는 왜 제주도를 배경으로 골랐을까? 조금 고개를 돌려보면, 고두심이라는 배우의 영향을 떼어낼 수 없다. <내가 사는 이유>(1997), <꽃보다 아름다워>(2004), <디어 마이프렌즈>(2016) 등 다양한 노 작가의 작품에 출연한 고두심은 윤여정, 김혜자, 배종옥 등과 함께 노희경 사단으로 분류된다. 얼굴 비치기 꺼려하는 노희경 작가가 <낭독의 발견> 고두심 편에서 인터뷰를 허락하고 고두심에 대해 이야기했던 기억도 새롭다. 작가가 제주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고두심이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톱스타들이 줄줄이 출연하는 극중에서 핵심적인 기둥역할을 맡은 것도 춘희 삼촌(고두심)이다. 끊임없이 몰아치는 파도와 바람의 움직임을 오랫동안 지켜봐온 한라산처럼 춘희 삼촌은 드라마의 대들보처럼 출연자들을 아우른다. 연기자 고두심은 조선 정조 때 객주업으로 거상이 되어 흉년 때 전 재산으로 곡식을 구입해 주민들을 구제한 김만덕 기념 사업회 대표로 활동 중이다. 제주에 대한 고두심의 사랑이 제주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면, 배우도 크리에이터에게 인사이트를 제공함으로써 또 다른 크리에이터가 된 것이다.   

tvN '우리들의 블루스'
tvN '우리들의 블루스'

아비 잃은 사람들,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시장에서 두절새우를 만났다. 머리가 잘린 몸통만 남아 말라있는 새우다. 등장인물의 상당수가 아비를 잃은 것이 눈에 띄었다. 선아(신민아)의 아버지는 사업이 실패한 후 이혼하고 고향인 제주도에 정착하지만, 결국 선아를 홀로 두고 트럭에 탑승한 채 바다로 투신하여 세상을 떠났다. 동석(이병헌)은 배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파도에 휩쓸려 죽은 뒤, 어머니가 아버지의 친구와 함께 살게 되면서 이복형제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한수(차승원)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고 아내와 자녀를 남겨둔 채 술에 취해 도랑에 빠져 타계했다. 한수 자신도 아내와 딸을 해외로 보내고 한동안 기러기로 고생했다.

은희(이정은) 역시 아버지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사망하고, 어머니마저 열사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생선 장사를 시작했다. 영옥(한지민)의 부모님은 화가였지만 생활고로 인해 동대문에서 장사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졌다. 인권(박지환)의 어머니는 순댓국 배달을 가던 도중 트럭에 치여 횡사했고, 아버지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더 일찍 세상을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엄마 없이 자라는 고등학생 정현과 영주 역시 어머니 역할까지 떠맡아야 하는 아버지로부터 온전한 아비사랑을 받지 못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반쪽 아비다. 

거의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은 아버지의 사랑과 보살핌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이들의 삶이 척박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지붕 같은 아버지, 이불 같은 아비 없이 한 데의 삶을 살았기 때문이 아닐까? 이 아버지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뇌졸중이나 교통사고로 죽기도 했지만, 태풍에 휩쓸려 죽거나 트럭에 탄 채로 바다로 들어간 경우도 있다. 제주의 옛 이름이 멀고도 험한 곳을 뜻하는 원악도(遠惡島)였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 많은 제주인들이 바다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그렇다면 아름다운 제주바다는 등장인물들의 비참한 삶의 근원이다. 바다는 아비를 빼앗았고, 자녀들에게 고통스러운 삶을 남겼다.

선아와 미란이 제주바다를 향해 울부짖거나 설움을 토해낸 것은 죽은 아비에게 토로하는 넋두리다. 따라서 정현과 영주가 임신 중절을 멈추고 아이를 낳아 기르기로 한 것은 아비 없이 죽을 뻔한 생명에게 아비가 잘려나가지 않도록 하는 의미 깊은 발걸음이다. 아비 없는 세상을 끝내고 척박한 삶에 종지부를 찍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원통스러운 제주 바다는 역설적으로 무척 아름답다. 드라마에는 제주 바다의 모습이 잘 담겼다. 동석과 선아가 바닷가를 거닐며 이야기하다 포착된 황혼녘의 제주바다, 정현과 영주가 임신 후 고뇌할 때에도 제주 바다의 푸른빛은 환상적이었다. 아름답지만 아비를 빼앗아간 제주바다는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근원이다. 이야기가 결핍에서 나온다면, 아비의 결핍이 이야기를 생성시키는 원천인 셈이다.  

한쪽이 잘려나간 두절새우처럼 뭔가 결핍된 등장인물들의 군상. 기러기 아빠, 우울증을 앓고 자녀를 빼앗긴 엄마, 친엄마와 불화를 겪는 아들, 선천적인 장애를 겪는 언니와 불가분의 삶을 사는 동생..... 드라마는 방송이 마땅히 해야 하지만 수행하지 못하는 공영적 가치들을 간단없이 건드린다. 필요한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지만, 지나치게 계몽적이라는 느낌도 없지 않다. 14화에서는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게 장애인을 둘러싼 담론이 불쑥 제시되었다.

드라마가 윤리 교과서 역할까지 해야 하는 걸까 싶다가도, 뉴스와 다큐멘터리, 생활정보 등 교양이 떠맡아야 할 역할을 감수하려는 드라마의 오지랖이 귄있어 보인다. 그것은 드라마의 장인들이 미학적 완성도를 희생하고서라도 대중을 가르쳐야 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의 넘쳐 보이는 교훈적 서사에 반대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시대가 악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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