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촘하게 설계된 도시의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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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촘하게 설계된 도시의 불평등
[비필독도서 54] '부동산, 설계된 절망'
  • 오학준 SBS PD
  • 승인 2022.06.13 15: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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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구 서울스카이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남 아파트 밀집지역 모습. ©뉴시스
서울 송파구 서울스카이 전망대에서 바라본 강남 아파트 밀집지역 모습. ©뉴시스

[PD저널=오학준 SBS PD] 시카고대학에서 공부하는 친구를 방문한 적이 있다. 숙소에서 도심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자주 이용했다. 대학병원 앞 이스트 57번가 정류장에서 4번 버스를 타면 다운타운까지 한 번에 갈 수 있었는데, 며칠간 같은 버스를 타니 흥미로운 풍경이 눈에 띄었다. 출발할 때만 해도 승객 대다수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으나, 도심에 가까워질수록 백인이 점차 늘더니 종점에서 내릴 때면 백인들 틈바구니를 비집고 내려야 했다. 건물의 높이와 반비례하는 버스 안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숫자는, 분리된 도시의 풍경을 함축하고 있었다.

철저하게 나뉜 도시의 기원이 궁금했다. 숙소 근처에 있는 한 서점에서 마주친 한 권의 책을 집어 든 이유다. 얼마 전 <부동산, 설계된 전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리처드 로스스타인의 <법의 색>이라는 연구서였다. 그 후 한동안 잊고 있었는데, 번역서가 나온 김에 서가에 묵혀 둔 책을 꺼내 읽었다. 제대로 답하지 못했던 과거의 궁금증을 해소할 수도 있겠단 기대를 안고서.

주거 정책과 교육 불평등에 대해 오랜 시간 연구해 온 저자는 미국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흑인과 백인의 주거 분리 현상이 단순히 개인적 편견이나 선택으로 만들어진 현상이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와 연방정부가 드러내 놓고 집행한 차별적 공공정책의 결과들이라 말한다. 민간 영역에서 이루어진 인종차별적 행위들이 끼친 영향을 부정하진 않으나 정부가 이를 용인하고 강화했기 때문에 더욱 확고한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다양한 법과 규정, 그리고 관행을 탐색하여 미국 대도시의 주거 분리 현상이 확립된 과정을 확인하고 미국인의 정치적·윤리적 책임을 묻는다.

20세기 초 미국에서 노예제는 공식적으로 철폐되었지만, 여전히 대다수의 도시에서는 인종 분리 정책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지방자치단체만이 아니라 연방정부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보증업무지침서>와 같은 인종차별이 명문화된 규정을 바탕으로 연방주택관리국FHA은 담보대출 보증을 승인하거나 거부했다. 이 때문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한 명이라도 포함되면 공동주택조합은 은행에서 자금 대출이 불가능했다. 공공사업관리국PWA은 “지역 주민 구성 원칙”을 바탕으로 한데 섞여 살던 흑인과 백인을 강제적으로 분리하는 신규 공공주택 계획을 추진했다.

'부동산, 설계된 전망'
리처드 로스스타인의 저서 '부동산, 설계된 전망'

몇몇 지방자치단체는 조례를 통해 공식적으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거주를 막으려 시도했다. 대부분의 시도는 실패했지만, 조직화된 백인 군중은 폭력을 자행했고 지역 경찰은 이를 묵인함으로써 민간 차원에서 압력을 가했다. 지방자치단체는 연방대법원의 판단을 우회하기 위해 도시계획위원회의 건축 심의를 이용해 흑인이 백인 거주지에 입주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흑인이 전입한 지역을 주택지구에서 산업지구로 변경하여 공해산업의 진입을 방조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는 국가란 촘촘하게 짜인 거대한 ‘절망’이었다.

정부는 더 나아가 백인들이 도심 아파트에서 교외의 단독주택 지구로 이주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적 지원을 제공하면서, 동시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뒤따를 수 있는 ‘사다리’를 걷어차는 데 집중했다. 파산 위기에 처한 가정들을 구제하는 융자회사들은 담보 부동산의 가치 평가의 기준으로 인종을 포함시켰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포함된 지역은 아무리 단독주택이 많아도 낮은 가치 평가가 매겨졌다. 높은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 백인들은 공영주택 단지를 짓기 전 지역 주민의 투표를 거치도록 한 주헌법을 이용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백인들은 교외의 부유한 주택을 손쉽게 소유하고, 흑인들은 주로 도심의 낡은 공동 주택에 세 들어 사는 전형적인 미국 대도시의 인종간의 주거 분리 형태는 이렇게 고착화됐다.

인종차별로 인한 지대 수익의 차이는 자산 축적의 속도에 있어서도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오늘날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낮은 소득과 사회적 위치의 근원이 도시의 주거 분리 현상과 불가분의 관계라 말한다. 국가가 보증을 거부함으로써 이들은 높은 월세와 비싼 할부 이자를 감당하는 동시에 한 달만 연체가 되어도 소유권을 상실하는 불공평한 주택 계약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학교, 도로와 같은 공공시설의 지역별 격차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더 많은 경제적 부담으로 다가온다. 4번 버스에 비친 분리의 풍경엔 여전한 불평등의 역사가 담겨 있었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13일 오전 서울 한 임대아파트 단지에서 서울형 고품질 임대주택 관련 발표를 하고 있다. ©뉴시스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달 13일 서울 한 임대아파트 단지에서 서울형 고품질 임대주택 관련 발표를 하고 있다. ©뉴시스

그곳에서 목격한 분리의 풍경은 한국에도 있다. 한때 전세로 살던 봉천동의 한 아파트 단지엔 도색이 다른 동(棟)이 하나 덩그러니 있었다. 단지 출구와 입구도 공유하지 않는 그 아파트가 임대아파트란 사실을 꽤나 나중에 알았다. 같은 동이지만 계단을 막아 임대아파트 주민이 못 올라오도록 막거나, 모양을 다르게 지어 임대아파트인지 한눈에 알아보게 만드는 사례들이 보도될 때마다 임대주택에 대한 차별 문제가 언급되었지만 여전히 차별과 분리는 공공연하다. 특히나 집요함에 있어서는 20세기 초 미국의 인종차별주의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 

흑백 갈등이 없으니 남의 나라 이야기라 치부하기엔, 비슷한 풍경이 내뿜는 불길함이 있다. 서울의 도시 공간 구조는 점차 가진 자들과 가지지 못한 자들의 구역으로 분할되어 왔다. 그 과정은 매끄럽지 않았다. 판자촌을 밀고, 빈민을 시야에서 지우는 과정은 피로 물들어 있다. 재건축·재개발 현장에서 자행된 용역 폭력과 이를 눈감고 때로는 조장하던 경찰의 모습은 잊기엔 너무 가까운 기억이다. 비명이 사라진 서울은 이제 다양한 위계로 분할되어 있다. 이곳에서 재개발될 불평등과 차별은 얼마만큼의 격차를 낳을까? 적어도 4번 버스가 시카고만의 것은 아니게 될 것이다.

저자는 헌법의 가치를 지킬 올바른 대표자를 선출하고, 그동안 누적된 차별을 해소할 수 있는 적극적인 수정 조치를 실행하게끔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다소 힘이 빠진 윤리적인 책임 요구에 가깝지만, 동시에 도시 공간 구조가 정치적으로 결정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음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적 차원의 차별은 공적 차원의 묵인과 조장 없이는 오래도록 강력하게 존속하기 어렵다. 분리된 도시의 풍경은 그 묵인과 방조의 결과다. 비슷한 침묵을 눈앞에 둔 우리는 어떤 정치를 원하는가? 대선과 지방선거 결과는 그리 희망적이진 않은 대답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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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 2022-06-23 14:49:30
내용은 괜찮은 거 같은데 뜬금없이 오세훈 시장 사진이 있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잘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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