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환자의 자리에 앉았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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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환자의 자리에 앉았을 때
[라디오 큐시트]
  • 박재철 CBS PD
  • 승인 2022.07.05 12: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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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3일 CBS '한판승부'에 출연한 지나영 존스홉킨스대 교수.
지난 6월 3일 CBS '한판승부'에 출연한 지나영 존스홉킨스대 교수.

[PD저널=박재철 CBS PD] 대구 봉제공장의 둘째 딸로 시작해 존스홉킨스대 교수로 끝나는 길이 하나 있다. 기립성 빈맥 증후군이라는 질환에서 출발해 12만의 셀럽 유튜버에 도착하는 길도 있다.

지나영 씨와 나눌 이야기의 방식을 고민하면서 어떤 길로 가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게스트 섭외 후 질문지를 쓸 때 ‘흐름 잡는 일’이 첫 번째다. 현안 때문에 연결한 인물은 관련 이슈를 중심으로 물으면 무난하다. 하지만 심층적인 인터뷰에서는 펼치는 페이지마다 전개되는 이야기가 다르다. 다층적인 삶의 서사를 품고 있는 초대손님은 어느 페이지부터 열지를 미리 생각해야 한다. 방송 시간에 쫓기다 보면 정작 묻고 싶은 걸 놓치기 일쑤다. 

지나영 교수가 지닌 특징은 의사이면서 환자라는 점이다. 병에 대한 장악력을 과시하기 위해 의사들은 보통 본인의 병을 숨기곤 한다. 아픈 사람이 아픈 사람을 낫게 할까 싶은 의구심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일까? 의사는 일반인보다 건강할 거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환자들 사이에 은연중 퍼져있다.

반면, 지 교수는 본인이 환자라는 사실을 공공연히 알린다. 그럼으로써 그 멍에의 무게로부터 스스로 벗어난다. 그는 기립성 빈맥 증후군과 함께 ADHD(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를 심하게 앓고 있다. 질환에 대한 은폐를 고민하는 대신에 지 교수는 다른 선택을 했다.

의사의 자리에서 환자의 자리로 강제적인 자리바꿈이 이뤄졌을 때 본인에게 일어난 심리적, 환경적 변화를 예민하게 관찰하고 기록했다. 심한 어지럼증으로 잠시 앉아있기도 어려워졌을 때, 누운 채로 받침대에 노트북을 묶어놓고 한 자 한 자 눌러 그 편린들을 글로 옮겼고, 책(<마음이 흐르는 대로>)으로 묶어냈다. 장 도미니크 보비의 <잠수종과 나비>가 자연스레 포개지는 대목이다. 그렇게 의사로서의 시력을 되찾아 눈을 비비곤 자신의 환자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됐다고 한다. 

사실, 지 교수가 활동하는 미국의 의료 문화에 비해 우리나라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가 좀 더 수직적이지 않을까 싶다. 짧은 면담과 권위적인 말투, 당연한 질문조차 삼켜야 하는 일방적인 지시에 환자로서 주눅 든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을 것이다.

©픽사베이
©픽사베이

지나영 씨에게는 어려운 역경을 딛고 세계적인 명문이라는 존스홉킨스대 교수가 되기까지의 고투, 그러니까 ‘성공신화’나 ‘영웅서사’보다도 의사에서 환자가 되었을 때 자신에게 찾아온 변화가 무엇인지가 더 궁금했다.
  
“스스로에게 눈을 돌릴 수밖에 없더라고요. 나는 어떤 사람이고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되지? 의사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한치도 움직일 수조차 없는 환자가 되었으니 이제 뭘 하고 살아야 되는 거지? 나의 소명은 뭔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뭔가? 수만 가지 생각들이 정말 폭포수처럼 머리 위로 쏟아졌어요. 제가 서 있는 자리에 지진이 일어난 느낌 같았어요.” 입장이 바뀌면서 느닷없이 찾아온 실존적인 질문들에 하나하나 답을 해나가면서 지 교수는 자신의 마음이 향하는 지점을 오래 바라봤다고 한다. 

‘있는 것과 없는 것, 가진 것과 빼앗긴 것,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 상황은 한곳(결핍과 상실)만을 보게 하지만, 마음은 또 다른 측면으로 고개를 돌리게 했다. 삶의 대차대조표, 그 좌와 우는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는 결론이었다고. 너무 단순하고 명확한 사실을 절벽 아래 밧줄마냥 꽉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긍정적인 마음 자세” 이 진부한 이야기가 그의 언어로 전달될 때 묘한 설득력을 발휘했다. 경험이 주는 힘 같았다. 본인의 경험칙은 환자에게도, 그 보호자에게도 고스란히 전달된다. 

“ADHD 아이가 있으면 부모님이 굉장히 절망하세요. 애는 이제 뭘 해도 안 되는 거 아니냐? 라고 물으세요.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저도 실수 굉장히 많이 하거든요. 그때마다 ‘바보야, 이 바보야’ 이러시면 안 돼요. ‘그 부분은 내가 좀 못 하기는 해, 그렇지만 나는 이런 걸 잘해, 나는 인간관계가 괜찮아,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친절한 사람이야. 나는 잘 웃어.’ 이런 거를 계속 스스로에게 얘기해야 돼요. 그래야 뭐든 극복할 힘이 내면에서 싹터요. 바이러스와 싸우는 항체처럼.” 

누군가 대신 아파해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누군가 대신 치유해 줄 수도 없다. 자신이 스스로를 보살펴야 외부의 것들과 대면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다. 돌이켜보면, 우리의 유년은 벌을 주고 훈육하고 질책하는 외부의 목소리가 유독 잦고 컸다. 스스로에게 상을 주고 살피고 칭찬하는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드물고 작았다. 지 교수의 말은 이제는 그 내면의 목소리를 키우자는 조언으로 들렸다. 의사의 자리에서 환자의 자리로 옮겨졌을 때, 지나영 씨는 자신을 근본에서 되돌아봤고, 아픈 내면을 끊임없이 격려하고 다독였다. 

어른이 되어도 마음속에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아이’가 존재한다고 한다. 심리적 케어는 그 아이에게, 홀대하기만 했던 그 아이에게 조심스레 다가서서 북돋아 주고 남몰래 지지하고 아낌없이 응원해주는 일이 아닐까. 지나영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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