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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나간 공포물 … 빛바랜 권선징악

|contsmark0|「전설의 고향」만큼 시청층을 다양하게 확보하고 있는 프로그램도 아마 없을 것이다. 여름철 납량물이 갖는 ‘더위 씻기’라는 기본적인 기능과 함께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는 숨죽이며 지켜보는 쾌감섞인 공포물을 기대케 하고, 청장년층은 일반적으로 공포물이 갖는 진보적인 텍스트로서 우리 사회의 모순을 어떻게 그려내고 있는지에 대한 기대감을, 노년층에게는 흠뻑 빠질 수 있는 아련한 향수를 안겨주며 tv 앞에 머물게 한다. 「전설의 고향」이 80년대와 함께 자취를 감춘 뒤 7년만에 부활한 지난 96년 무려 35%를 상회하는 화려한 시청률로 그 건재함을 과시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시청층의 다양함과 납량물로서의 기능이 있다. 그러나 3년 전의 화려한 부활과는 달리 올해 「전설의 고향」은 그다지 채널고정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후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일반적인 이유가 있다. 경제위기에 따른 일상생활의 빠듯함이 이미 납량물의 기능을 충분히 대체하고 있었고, 집중호우와 전국적으로 이어진 수해피해 또한 공포물의 긴장과 향수를 감상하기에는 사치스러운 상황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청률 지수는 프로그램의 아주 일부분만을 대변할 뿐이고, 상업화의 함정에서 벗어나고자 허우적대는 우리들 방송프로그램 제작환경에서는 무시할수록 도움되는 평가지수이지만 시청자들의 다양한 시청욕구와 이미 고루 맞물려 있는 「전설의 고향」은 그 해석의 여지가 조금 다르다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짚어보자. 먼저 전통적 공포물로서의 위상이 크게 흔들린 점이다. ‘여우골’, ‘씨받이’, ‘조강지처’, ‘방울소리’, ‘귀면살풍’, ‘접포’ 등 12회에 걸쳐 선보인 대부분 극의 흐름이 징악의 과정에서 최소한 담보해야 할 공포물적 성격을 너무 얄팍하게 처리하면서 극의 긴장감을 완전히 상실하고 있었다. ‘죽귀’와 ‘천녀도’의 경우에는 남녀간의 사랑이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로 납량물이라기보다는 평이한 멜로물에 가까웠다. 심지어 ‘조강지처’와 ‘접포’ 등은 피해당사자가 원혼으로 떠돌며 복수를 하기는커녕 대신 복수를 하려는 주변인들을 만류하고 설득하기까지 한다. 이렇게 그동안 「전설의 고향」이 보여준 권선과 징악이라는 본래적 특성이 거의 사라진 반면 사랑과 용서, 화해라는 명분 속에 사회의 기존질서에 별다른 저항없이 편승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카타르시스의 부재로 이어졌고, 극적 긴장감과 완성도를 떨어뜨리면서 납량물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를 전혀 채워주지 못한 것으로 해석된다. 「전설의 고향」은 본래적으로 공포물이다. 또한 권선징악에 기초한 철저한 복수극으로, 징악의 과정에 지배층에 대한 분노와 심판의 의미를 담고 있다. 그렇다면 그 의미가 이리도 취약해진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간단히 해석된다. 최근 우리 사회의 통합성을 강력히 추진해 나가는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와 서로 맞물린 결과이다. 징악의 대상이었던 지배질서, 곧 지배층의 ‘악’에 대해 초자연적인 힘을 빌어 ‘징’을 행하는 전통적 공포물 속에 내재된 민중이데올로기가 철저히 후퇴한 것으로 다름아닌 현 지배이데올로기의 적나라한 반영인 셈이다. 이에 대한 비평모임의 의견도 간단하였다. 권선징악에 충실해라! 「전설의 고향」이 갖는 최고의 정체성은 바로 충실한 권선징악이다. 그 민중성을 시청자들은 결코 외면하지 않을 것이고, 그에 대한 신뢰감과 프로그램에 대한 정체성 회복이 제작진들에게 요구된다는 것이었다. 두번째로, 우리 사회의 이데올로기가 축적해온 원형적인 모티브를 충실하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죽귀’와 ‘천녀도’의 경우 이러한 지배이데올로기를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이고 있을 뿐 아니라 진보적인 텍스트로서의 정체성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 점은 「전설의 고향」에 대한 매력을 한없이 추락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잠시잠시 사회의 모순을 고발한 대목이 엿보이기는 한다. ‘접포’에서는 열녀문에 얽힌 조선시대 여인들의 한(恨)과 가부장제의 질곡을 고발하고 있었고, ‘조강지처’ 역시 비슷한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피해당사자들이 원혼이 되어 징악을 행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질서를 그대로 저항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고, 혼백이 되어서도 화해를 추동해내는 역할을 계속적으로 담당한다. ‘씨받이’나 ‘죽귀’, ‘천녀도’의 경우에도 가부장적 울타리가 여인네들을 옥죄이던 사회규율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으나 여인들의 지배질서 이탈행위는 전혀 성공하지 못한다. 초자연적인 힘은 그녀들이 넋두리 전달에 잠시 이용되었을 뿐이고, ‘천녀도’에서는 위대한 지배규율에 의해 결국 지옥으로 떨어지는 벌을 감내하는 것으로 그려진다.여기에서도 제작진들이 프로그램 고유의 정체성을 고민하지 않고, 사회통합력을 주도하는 지배집단의 이데올로기에 안이하게 편승한 결과라 할 것이다.세번째로 극의 리얼리티가 부족하고 완성도가 떨어진 점이 시청자들의 관심을 모으지 못한 요인이라 여겨진다.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지나치게 생략되어 극의 깊이를 느낄 수 없었던 점도 그렇고, 극 흐름의 필연성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점, 컴퓨터그래픽장면이나 특수효과 연출 등도 어설프고 엉성하여 공포스럽거나 괴기스런 장면의 리얼리티를 완전히 놓친 점 등이 결정적인 이유라 할 것이다. 특히 동물과 인간을 합성한 그래픽화면은 너무 엉성하여 제작진의 무성의가 엿보이는 대목이었다.남자귀신이 등장하는 등 간혹 이색적인 면이 눈에 띄었음에도 사건의 전개방식이 천편일률 비슷비슷하였고, 밋밋한 결론, 반전없는 흐름과 클라이막스의 부재 등 이야기의 단순처리방식으로 시청자들의 관심을 끌어내는데 실패한 것으로 평가된다. 납량물이라 하여 ‘징악’의 행태가 반드시 직접적일 필요는 없는데도 그러한 단순도식에 얽매여 리얼리티를 떨어뜨렸고, 「전설의 고향」이 갖는 특유의 진한 여운을 상실한 점이 못내 아쉽게 생각된다. 극의 출처가 거의 밝혀지지 않은 점도 개운치 않았다. 이는 실제 전설에 근거했다기보다는 작위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각색의 정도가 너무 크고, 작위성이 곳곳 느껴지는 대목은 전설에 얽힌 아련한 향수를 기대한 시청자들을 오히려 돌려 앉히는 반감으로 작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설의 고향」이 갖고 있는 진한 향수는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이다. 공포물이 갖는 진보적인 텍스트로서 기본정체성을 회복한다면 시청자들은 언제든 애정있는 갈채를 보낼 것이다. 끝으로 그 동안 비평모임에 참가하면서, 시청자들의 움직임과 모니터활동이 제작환경에 보탬이 되는 실제성을 갖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갖추어야 하는지 경험적으로 배울 수 있어 참으로 유익했음을 고백한다. 어쩌면 상업화의 거센 흐름에 맞서 고군분투하는 제작진들의 의지를 만날 수 있어 무엇보다도 기뻤고, 따뜻한 기억인 것 같다.
|contsmark1|pd연합회 방송비평모임정리 : 조정하<한국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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