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없는 그림책을 읽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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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배우는 것들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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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저널=김지원 EBS PD] 어렸을 때 나는 책을 빠르게 읽는 것을 좋아했다. 부모님과 백화점을 가면, 두 분이 쇼핑하는 동안 나는 백화점 내에 있는 서점에서 책을 읽었다. 책이 재밌어서 읽기도 했지만, 두 분이 오시기 전까지 많은 숫자의 책을 읽곤, “짧은 시간 안에 많이도 읽었네”라는 칭찬에 성취감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그림책을 읽은 기억이 별로 없다. 그림책은 글자가 많지 않으니 쉬운 책이라고 생각했다. 10분이면 다 읽는 책, 어린애들이 읽는 책이라고 여겼다.

그림책을 다시 본 건 읽기 부진 아동을 촬영하면서다. ‘다양하고 좋은 그림책이 많구나’ 정도로 생각하던 와중에 ‘글 없는 그림책’을 보게 됐다. 글자는 하나도 없이 그림만으로 이루어진 책. “응? 책에 글자가 없어? 어떻게 읽어야 하지?” 처음 본 순간 당황했다. 

당시 촬영하던 아이는 초등학교 2학년이었는데, 어렸을 때 병을 앓아 몇 년간 병원에 있었다. 다행히 초등학교 1학년 때 완치가 되어 학교를 다니는데, 병원 생활로 인해 글자를 배우는 것이 또래 친구들보다 늦어져 따로 교사에게 읽기 지도를 받고 있었다. 아이는 똘똘해서 자모음은 금방 깨쳤다.

생각보다 빠르게 글자를 금방 읽었지만,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했다. 병원생활로 경험이 부족한 탓에 배경지식과 어휘의 수준이 낮았다. 사계절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인 것은 알지만 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고, 여행, 소풍 등 직접 봄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이 ‘봄’이라는 글자를 몰라도 봄에는 나비가 날고, 꽃이 피고, 봄 소풍을 가곤 했다는 것을 알아서 ‘봄’이 무엇인지 금방 이해하는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글자를 배우는 시기가 늦어 현재 한글을 어려워하는 아이니, 글자 위주로 수업을 해야 하겠거니...’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자를 읽어도 책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다른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교사의 선택은 ‘글 없는 그림책’이었다. 글 없는 그림책에는 글자가 없다. 때문에 정답도 없었다. 아이가 상상하고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말하면 되었다. 아이의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표현하고 싶은데 단어를 모를 때는 ‘그런 느낌은 이런 감정이야’ 라고 교사가 알려주었다. 교사의 도움 아래, 아이는 자신의 생각을 맘껏 펼쳤다. ‘책을 읽으면 한 사람의 머릿속에 상상의 세계가 넓게 펼쳐진다’라는 책의 긍정적 효과를 말할 때 흔히 사용하는 글귀 같은 현상을 나는 처음으로 생생하게 목격했다. 

아이가 간 후, 아이가 본 책을 나도 펼쳐봤다. 기묘한 상상력 따위 없는 딱딱한 머리로는 글자 없이 그림만 펼쳐져 있는 낯설었다. 이 이야기의 화자가 누구인지, 이 화자는 어떤 사연을 가지고 이 그림책을 헤매고 있는 것인지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답도 없고, 방향도 정해져 있지 않은 세계. 글자는 잘 모르지만 그 책을 즐겁게 즐겼던 아이와는 완전히 달랐다. 그 책에 대한 이해도나 향유의 정도는 나보다 그 아이가 훨씬 높았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닌데, 아이가 나보다 나을 수 있다는 것을 완연히 확인하게 된 계기였다. 글자를 안다고 다 아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안다고 착각했던, 혹은 확신했던 것에 대해 겸손해졌다. 

지난 5월 2일 서울 광진구 광장초등학교 학생들이 담임선생님에게 관련 안내를 받고 있다.  ©뉴시스
지난 5월 2일 서울 광진구 광장초등학교 학생들이 담임선생님에게 관련 안내를 받고 있다. ©뉴시스

글 없는 그림책을 다시 만난 건 유치원 아이들을 대상으로 촬영을 할 때였다. 그 날은 ‘아직 한글을 다 떼지 못한 만 4~5세의 아이들이, 자기들끼리만 책을 읽을 수 있을까?’에 대한 관찰 촬영이 있었다. 글 없는 그림책을 놓고 두 명의 아이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무런 지시가 없었는데도 아이들은 금방 규칙을 정했다. 한 장씩 서로 번갈아가며 읽어내기로. 그렇게 두 아이는 책 한 권을 놓고 무려 20분 동안 책을 읽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고 너무나 평화롭고, 즐겁게. 책을 다 읽은 후에는 “벌써 끝났네. 아쉽다”고 말하며. 

한 연구에 따르면 유아들에게 협동하며 책을 읽게 하면, 혼자 읽거나 경쟁하며 읽을 때보다 사용하는 단어의 수도 많고, 이야기의 이해 수준도 높게 나온다. 더불어 이 과정에서 친사회적 행동을 하게 된다. 또래와 협동하며 읽으면 공동 목표를 추구하며 서로 돕는 상호보완적 역할을 하므로 긍정적인 상호작용 속에서 이야기 이해 수준이 높아지고, 타인에게 관대해진다는 것이다. 

아이들끼리 읽는 것은 어른이 읽는 것보다 경험과 지식이 부족할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 안에서 나름의 성장과 협동을 하며, 그 과정에서 서로 관계를 쌓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저성취 아동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마음에 되뇌는 말이 있다. ‘아이의 눈높이에서 머무를 것’. 어른이 아이의 눈높이에서 머무르는 것은 쉽지 않다. 배경지식도, 정보도, 나아가야 할 목표도, 목적도 명확하게 있는 어른들에게 아이는 곧잘 “왜, 어째서 이러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풀어내야 하는 과제일 때가 많다. 

하지만 아이들은 저마다의 세계를 가지고 있는 작은 인간들이고, 가능성의 씨앗을 지니고 있는 존재다. 말로만 듣고, 머리로만 이해하던 그 진실을 촬영을 하는 동안, 아이들을 가까이에서 관찰하면서 발견하는 기쁨과 놀라움은 무척 컸다. 

가야 하는 목표와 목적에 너무 매몰될 때 ‘글 없는 그림책’을 본다. 그림 하나 하나마다 천착하며, 이 세계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본다. 나와 다른 해석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럼에도 그 사람과 협력하여 그림들을 해석하고 이야기를 이어나갈 때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 그 사실들을 찬찬히 떠올려본다. 어린 아이들, 어린 스승들이 내게 준 가르침이다. 

 

*참고문헌

'또래와 함께 읽기 맥락에 따른 유아의 읽기 반응'(최지수·최나야, 서울대학교,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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