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계+인', 최동훈표 맛깔난 대사는 왜 사라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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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 최동훈표 맛깔난 대사는 왜 사라졌나
예상만큼 호응 못 얻은 '외계+인' 1부
의미 있는 도전이지만...한국적 맥락 빠진 세계관에 무미건조해진 대사
  • 홍수정 영화평론가
  • 승인 2022.07.29 1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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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외계+인' 스틸 컷.
영화 '외계+인' 스틸 컷.

[PD저널=홍수정 영화평론가] 올여름 극장가를 찾아온 <외계+인> 1부가 예상만큼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개봉 첫 주 영화를 찾은 관객 수가 100만을 못 넘었다. 최동훈 감독이 여태 <타짜>(2006), <도둑들>(2012) 등 최고의 흥행작을 연출한 점을 감안하면 아쉬운 성적이다. 그의 영화가 개봉 후 5일 동안 100만 관객을 동원하지 못한 것은 <범죄의 재구성>(2004)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나 <외계+인>은 쉽게 혹평할 수 없는 영화다. 나름의 성취가 분명하기 때문에. 방대한 세계관과 캐릭터에 대한 신고식을 성공적으로 수행해낸다. 한국의 마블, 충무로의 어벤져스. 이런 수식어들이 영화의 성취를 요약한다. 한국 영화계의 의미 있는 도전이라 할 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계+인>에서 엿보이는 아쉬운 점을 모른 체하기는 어렵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은, 최동훈 특유의 '말맛'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가 쓴 대사에서 느껴졌던 그 쫀득쫀득한 맛. 

최동훈의 '말맛'이란 무엇일까. 그의 대사들은 배우의 입에서 경쾌하게 튀어나와 관객의 뇌리에 꽂히고는 했다. <타짜>에서 고니(조승우)는 자기 밑에 들어오라는 곽철용(김응수)에게 "늑대 새끼가 어떻게 개 밑으로 들어가냐"라고 받아친다. <도둑들>에서 예니콜(전지현)은 팹시(김혜수)를 두고 "어마어마한 쌍년"이라고 수군대며 관객의 폭소를 자아냈다. 인물의 처지와 감정을 단번에 꿰뚫는 표현. 재치와 능청스러움을 잃지 않는 센스. 그는 류승완과 더불어 한국어를 날카롭게 포착해서 맛깔나게 풀어내는 감독 중 하나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외계+인>은 좀 다르다. 예리하게 반짝이던 말들이 사라지고, 뭉툭한 대사들이 러닝타임을 채운다. 능글맞게 촌철살인을 던질 법한 타이밍에서 인물들은 평이한 대사를 읊조린다. 뻔한 말을 하는 사람은 재미가 없는 법. 캐릭터의 매력도 반감됐다. 대체 최동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영화 '외계+인' 스틸 컷.
영화 '외계+인' 스틸 컷.

<외계+인>의 대사가 무미건조한 이유로 '방대한 세계관'이 자주 거론된다. 인물들의 입을 빌려 방대한 세계관을 설명하려다 보니 재치를 부릴 틈이 없다는 것이다. 적절한 분석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내밀하게 숨겨진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다. 

먼저 최동훈의 전작들을 떠올려보자. 그의 전작에 나오는 대사들을 음식에 비유하자면, '매콤 달콤한 떡볶이'같다. 매콤하게 톡 쏘면서도 감칠맛이 풍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맛을 즐겨 찾았다. 또 대단히 한국적이다. 꾸덕한 떡볶이 양념에 갖은 재료가 들어있듯이, 최동훈의 대사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 언어 관습이 짙게 배어있다. 

<타짜>에서 평경장(백윤식)은 부자가 되고 싶다는 고니에게 화투패를 보이며 "이것이 정주영이고 이병철"이라고 한다. 이 말이 단번에 와닿는 이유는 우리가 한국의 기업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는 아귀(김윤석)의 협박이 귀에 꽂히는 이유는 그 용어와 억양의 느낌을 우리가 공유하기 때문이다. 최동훈의 맛깔난 대사들은 '한국적 맥락' 위에서 비로소 숨을 쉰다. 그것들은 한국의 역사, 문화, 언어에 대한 무수한 레퍼런스를 전제한다. 한국적 맥락 위에서 이뤄지는 언어유희인 것이다. 

이런 대사들은 국내 관객에게 잘 어필한다. 반면 같은 맥락을 공유하지 않는 외국 관객들은 어렵게 느낄 수 있다. 지역색이 강한 영화의 특징이다. 해당 지역 바깥에 있는 관객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이제 <외계+인>을 다시 보자. 이 영화는 최동훈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한국을 배경으로 한다. 그런데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다. 한국의 지역색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야기는 고려시대, 현대 한국을 오가며 펼쳐진다. 그러나 (그 광경이 멋진 것과 별개로) 이 영화를 굳이 한국에서 찍어야 할 이유는 딱히 없어 보인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 위에서 전개되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 속 공간이 그저 한국을 닮은 가상공간이라고 해도 이 영화를 이해하는 데 별 무리가 없다.

대사 역시 마찬가지다. 한국적 맥락 위에 오고 가는 언어유희는 찾아보기 힘들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피하기 위해 조심한다는 인상이 있다. 한국말을 쓰고 한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외계+인> 속 세계는 국적이 없다. 늘 한국색이 짙게 느껴지는 영화를 찍던 최동훈으로서는 이례적인 변화다. 

이런 연출의 이유는 다양할 것이다. 탈지역적인 공간을 구축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또는 해외 수출을 고려해, 외국 관객이 영화를 편하게 접하게 하려는 전략일 수도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우리가 섣불리 짐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이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어떤 이유에서든 최동훈의 영화에서 한국적인 색채가 옅어지며, 그 위에서 뛰어놀던 맛깔난 대사들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우려스러운 일이다. 한국의 공기를 듬뿍 머금은 대사들. 그것은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라, 최동훈 세계의 생기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외계+인>에 이르러 최동훈은 광활한 세계관을 펼쳐냈다. 분명 의미 있는 성과다. 그러나 아무리 넓은 세계로 나아간다 하더라도 최동훈 영화의 요체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묻는다면, 나는 대사의 말맛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가 한국적 토대 위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하다. 한국적 맥락 위에서 마음껏 자유자재로 뛰어노는 언어들. 여기에 최동훈 영화의 활력이 있다. 이점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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