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정치인들의 방송 뒤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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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큐시트]

먹구름이 낀 국회 본회의장의 모습. ©뉴시스
먹구름이 낀 국회 본회의장의 모습. ©뉴시스

[PD저널=박재철 CBS PD] ‘After Hours’는 뮤지션들이 라이브 무대를 끝낸 뒤 비공개적으로 뒤풀이 연주를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Hours는 상업적인 목적의 연주 시간을 뜻하는 것이겠다. 

주로 재즈 씬에서 쓰이는 이 용어는 한 레코드 전문점의 상호이기도 했다. 주인에게 가게 작명에 대해 물은 적이 있다. 재즈는 ‘즉흥성’과 ‘스윙감’(흥)을 생명으로 하는 음악이라 ‘After Hours’에서 더 재즈다운 연주들이 많았던 점에 착안했다고 한다. 격식과 평가에서 자유로운 이 시간이 뮤지션들 사이의 친교는 물론, 각자 연주 스타일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기회였을 것이다. 

지금은 현저히 줄었지만, 방송 후 ‘After Hours’ 같은 시간이 간혹 있다. 출연자와 갖는 식사나 술자리다. 뒤풀이 토크의 장이라고 해야 할까, 스튜디오에서 ‘차마’ 혹은 ‘미처’ 못 한 말들이 이 자리에서는 다양한 화법으로 구사된다. 대개의 회합이 그렇듯, 분위기가 받쳐주면 마치 바닥에 툭 떨어져 굴러가는 두루마리 휴지 마냥, 끝 모르게 이야기가 술술 풀려 나온다. “방송 때 지금처럼 해주지” 싶게, “저렇게 솔직해도 되나” 싶게. 평소라면 닫혀있을 출연자의 속마음, 그 미닫이문이 살짝 열린다. 

며칠 전 자리도 그랬다. 두 원로 정치인이 정국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했다. 당내에서도 쓴소리를 잘한다고 소문난 이들이라 기획된 코너였다. 방송에서는 물론이고 뒤풀이 자리에서도 정치권 이야기는 풍성했다. 이슈의 감춰진 맥락이나 유명 정치인들의 품성에 대한 귀동냥도 할 수 있었다. 

수해복구 현장서 “비 좀 왔으면 좋겠다”고 말해 여론의 뭇매를 맞은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 발언을 공개한 채널A 화면 갈무리.
수해복구 현장서 “비 좀 왔으면 좋겠다”고 말해 여론의 뭇매를 맞은 김성원 국민의힘 의원의 발언을 공개한 채널A 방송 화면 갈무리.

정치인들은 대체로 말하기를 즐겨한다. 자신의 발언에 대한 호평이든 혹평이든 잊히지 않길 만을 원한다. 정치인의 말은 정치생명의 시작과 끝이라 해도 과하지 않다. 말의 논리와 말의 적합성 즉 ‘로고스(LOGOS)’가 정치인의 기량을 가늠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인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마주하는 정치인들의 말은 위태롭기 그지없다. 논리나 적합성을 따지기에도 민망할 수준이다. 

“솔직히 비 좀 왔으면 좋겠다, 사진 잘 나오게”, “마치 제 아내가 법인카드를 쓴 것처럼 그렇게 하는 것은 좀 과하다”, “높은 자리도 아니고 행정 요원 9급으로 들어갔는데, 그걸 갖고 무슨”, “삭감 예산, '의원님 꼭 살려 주십시오'라고 절실하게 한번 해 보세요.”

상황에도 맞지 않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말들, 듣는 이의 귀를 의심케 하는 말들, 이런 말들로 자신조차 온전히 ‘대변’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누군가를 ‘대의’ 하겠다고 스스로 두 팔을 걷는다. 용감하게. 

어느 자리에서든 정치 영역으로 이야기가 옮아가면 그곳은 수렁이 된다. 빠져나오기 힘들다. 술이 몇 순배 돌자,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비방송용 언사가 수도꼭지에서 빠진 호스의 물줄기다. 한 원로 정치인은 그 와중에서도 퇴영적 정치문화의 핵심을 짚는다.

“선거법 안 고치면서 정치개혁 하자는 말, 다 헛소리야. 지역주의도, 사표 논란도 그리고 과잉 대표성도 다 지역구에서 한 명을 뽑는 소선거구제 때문인데 왜 중대선거구제로 안 바꿔? 한마디로, 자기 지역구 뺏길까 봐 못하는 거지. 이런 구조에서 다른 목소리 내는 정당, 절대 못 나와. 결국, 거대 양당이 서로 싸우는 척하지만 한마디로 적대적 공생 관계야. 과반이 넘는데 진보정당이면 이거 왜 못해? 안 하는 거지.”
 
맞장구를 치면서도 질세라 또 다른 원로의원이 말을 얹는다. 다소 격정적이다. 

“청년 정치, 청년 정치하는데 이게 지금 실체가 있어? 없다고 봐야지. 무슨 나이만 젊으면 다 청년 정치야? 메시지가 좀 투박해도 결기가 있고 태도가 꿋꿋해야 청년이지. ‘무릎을 꿇느니 서서 죽겠다’, 뭐 이런 각오가 느껴져야 유권자들이 움직이지 않겠어? 근데, 옳은 소리 좀 하다가도 권력에서 부르니 쪼르르 달려가고. 젊은 시절 김대중, 노무현 같은 배포가 없는데 무슨 청년 정치한다고? 겉늙은 정치야.”

방송쟁이들의 After Hours인 이런 뒤풀이 자리에서 자주 느끼는 거지만 출연진들이 다양한 직업군인 탓에, 그 자신의 직업윤리가 은연중에 드러난다. 3선 이상의 ‘직업 정치인’은 특유의 교집합적 성정이 있다.

말이란 무기를 들고 격투장에 뛰어든 검투사의 역동성. 사안의 본질을 날카롭게 노려보고, 정확한 말로 상대방의 급소를 찌르듯 공격하며 설전을 벌인다. 누구의 명분이 보다 정의로운지 거칠게 다툰다. 실리는 물론 그 뒤에 교묘히 감춰져 있겠지만. 그들은 논리적 언어 구사 못지않게, 어떤 적의에 찬 뜨거움을 가슴에 품는다. 로고스에 대비되어 일종의 '파토스'(PATHOS)라 명명해야 할까? 이 격정적이고 저항적인 정념은 정치인을 정치인답게 하는 또 다른 에너지이기도 하다. 

'그러려니' 체념하거나, '그것 봐라' 냉소하거나 그 두 가지 반응만을 이끌어내던 우리 정치의 수많은 민낯들. 그 속에서도 나이를 잊고 강한 울분과 날선 비판을 쏟아내는 After Hours의 두 원로 정치인들을 보면서, 정치에 대한 나의 오랜 염증과 무관심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문득, 대학 초년생 시절 정치학 개론 시간에 접한 2500년 전 한 정치인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 아테네 사람들은 공적인 일(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을 순진무구한 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단지, 쓸모없는 사람으로 간주할 뿐입니다.”(페리클레스의 추도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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