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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밥을 놓으며
배인수

|contsmark0|지지난번 pd상 시상식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니 무슨 일이랄 것까지는 없고 시상식 프로그램 도입부분에 방송에 관련된 여러분들의 인터뷰를 끼워 놓았는데 질문인즉슨 pd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 혹은 pd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여러 가지 대답을 해주셨는데 이를테면 방송의 꽃이니, 피 마르고 더러운 일이라느니 뭐 그런 대답들이 죽 지나가다가 꽤 유명한 아나운서 한 분이 이렇게 대답하시는 것이었습니다. “pd란 마흔이 되기 전에 머리 속에 있는 아이디어를 다 끄집어내서 뭔가 만들어내는 사람” 벌써 2년이 넘은 기억이니 아마 정확치는 않겠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말씀 중에 마흔이란 말이 내 가슴에 와서 탁 걸렸습니다. 마흔이라 마흔. 그 분이 무슨 뜻으로 하필 마흔을 pd가 능력 발휘할 수 있는 한계시한으로 잡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저는 그 말이 영영 가슴속에 소화되지 않은 채 남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올해 제 나이가 꼭 마흔입니다.방송,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텔레비전에 나갈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는데 한 몫 끼어들기 시작한지 이제 꼭 15년이 되었습니다. 이제와 새삼스럽게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동안 제 이름을 걸고 나간 프로그램이 5백편은 족히 넘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교육방송의 특수한 사정 때문이겠지만 정말 많이도 만들었다 싶은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이번에 쓸데가 있어서 그 동안 제가 만든 그 수많은 프로그램 중에 몇 편을 골라 복사를 했습니다. 복사를 하면서 정말이지 오랜만에 오래 전에 제가 만든 프로그램을 보고 있노라니 정말이지 말 그대로 목불인견이었습니다. 그러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차마 제정신으로 눈뜨고는 못 볼 그런 광경들이 뼈저린 후회를 등에 업고 후닥닥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 것이 바로 내 청춘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지난 세월의 흔적이었습니다.
|contsmark1|“pd는 프로그램으로 말한다” 교육방송에서는 이 말이 때때로 조롱거리가 되곤 합니다. 그러나 거역할 수 없는 힘이 그 안에 분명히 있습니다. 제가 pd인 이상 이 말은 제 인생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살다보니 어느덧 껍데기가 되어있었습니다. 전 프로그램을 잘 만드는 pd가 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그 묘약은 프로그램을 만들면 만들수록 아득해지기만 합니다. 그런 묘약이 있는지 없는지 그것도 모릅니다. 그런데 정작 맥풀리는 일은 그걸 알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도 그믐날 밤이라는 것입니다.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하고 찍어내기도 하고 뽑아내기도 하면서 느는 것은 잔꾀, 그리고 갑갑함뿐입니다. 하기사 밑천이라고는 방송국 들어와서 어깨너머로 배운 것하고 대책 없이 프로그램 만들면서 정말이지 피눈물하고 바꾸면서 알게 된 게 전부인 저로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차라리 그 짧은 밑천으로 이나마 버틴 게 다행인지도 모르죠.여하튼 전 아직 무엇이 좋은 프로그램인지 알지 못합니다. 말할 것이 없지는 않지만 그것을 프로그램으로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막막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저승사자처럼 방송시간은 다가오고 전 뭐든지, 어떻게든지 말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한 개 두 개 제가 허겁지겁 세상에 널부러놓은 프로그램들이 쌓여가면서 어느 순간 제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같은 길을 뱅뱅 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런 걸 뫼비우스의 띠라고 하던가요? 그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막상 그런 생각이, 그런 느낌이 사정없이 밀려드니 정말 막막했습니다. 감히 말하자면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그렇게 다른 모양이지요. 그리곤 그 돌고 도는 길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별 방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방법인지 아닌지도 잘 모르면서 미국에 가서 미국말로 방송을 공부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지금 내가 하는 짓이 거기에서 시작된 것이니까 그 곳에는 뭔가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결정하기까지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실행에 옮기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어쨌든 저는 이제 미국으로 갑니다. 거의 무작정 갑니다.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은 굳이 따져보자면 어디론가 가는 것이 아니고 그 어디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제가 뱅뱅 돌던 그 뫼비우스의 띠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일단 벗어난 뒤에야 제가 뱅뱅 돌던 그 길이 과연 어떤 길이었는지 보일 것 같습니다. 또 그 길을 보고 난 뒤에야 제가 갈 길이 보일 것 같습니다.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그 둘이 같이 이루어진다면 물론 더욱 좋겠지요. 어쨌든 제게 있어서 분명한 것은 이렇게 허겁지겁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도 모를 길을 달리다가는 끝끝내 다른 길은 가보지 못한 채 커튼 콜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이고 그건 한 번 사는 인생에서 참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갑니다. 쓸데없는 넋두리를 귀한 지면에 늘어놓아 정말 죄송합니다. 전 방송도 결국은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데 보탬이 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고 배우고 느끼게 될 많은 것들이 살만한 세상을 만드는데 보탬이 되는 방송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contsmark2|지금 제가 저지르는 짓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라는 것은 물론 잘 압니다. 휴직을 했다고는 하나 요즘 같은 시절 그건 반쯤 그만둔 거나 진배없는 노릇이고 그나마 받던 알량한 월급 날아가 버리고 나니 덜컥 겁이 나기도 합니다. 앞날에 대한 아무런 담보 없이 그나마 쥐고 있던 주먹밥을 놓아버리는 것은 정말 멍청한 짓이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멍청한 짓은 끝끝내 주먹밥만 목숨걸고 쥐고 있는 짓입니다. - 인수 생각
|contsmark3|ebs 배인수 pd는 지난 8월 15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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