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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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앞에서
  • 지웅 CBS 편성국 부장
  • 승인 2005.01.2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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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회사를 그만두려고 했었다. 제법 복잡한 심경. 세상을 버리려고 우물 앞에서 고무신을 벗는 낭자의 심정과 비슷한 점도 있고, 교도소 철문을 나서서 차가운 두부 덩어리를 우걱우걱 입에 밀어넣는 출소자의 비장함 같은 것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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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뭘 할까, 생각하니 휘잉, 황야의 모래바람이 얼굴에 와 닿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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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론 자유를 되찾은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그야말로 ‘wild wild world’에 알몸으로 떨어진 느낌이었다. 당장 먹고 살 걱정보다도 주위의 자못 한심하다는 시선이 더 부담스러웠던 것이 그나마 배부른 투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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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 생활 14년,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회사의 문을 나서려니까 ‘내가 뭔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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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에게 남는 건 색바랜 명함뿐이라는 말도 있고 pd가 남기는 건 쓰레기통에 들어갈 제작계획서뿐이라는 얘기도 있지만, 방송사 문을 벗어나 거친 세상에 홀로 던져졌을 때, 과연 pd라는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처럼 진지한 고민을 해 봤다. 결과는 불행히도 쉽지 않다는 쪽이었다. 동업자 여러분께는 죄송한 얘기가 될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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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cbs노조가 9개월의 장기 파업을 계속했을 때, 9일째 단식을 하면서 그 비슷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어떤 이유로든 ‘방송쟁이’ 일을 그만두게 된다면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도대체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상황이 워낙 심각해서였는지, 아니면 너무 배가 고파서였는지, 그 때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제로 뭐든지 해야 할 상황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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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그런 절박한 상황에서도 ‘설마 회사가 어떻게 되기야 하겠어?’ 하는 제법 한심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파업으로 방송이 망가져가는 모습 앞에서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방송이 망할 리는 없다’는 확신, 그리고 ‘방송 잘 해 보려고 지금 이러고 있는 것’이라는 스스로의 믿음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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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방송 ‘시대공감’의 강일석 pd 같은 분들이 애정을 갖고 cbs 파업사태를 다뤄준 것도 우리들에게는 눈물나도록 고마운 일이었다. 새삼스럽지만 방송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힘없는 취재대상의 입장에 서서 실감할 수 있는 기회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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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제 단 몇년만에 세상은 달라졌다. 방송사도 문을 닫게 되는 세상에 우린 와 있는 것이다. 한 순간에 방송이 죽고 한 순간에 pd들을 비롯한 많은 방송인력들이 실업자가 되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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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거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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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 몰아치는 거리로 내몰린 경인방송 식구들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저 분들은 뭘 할 수 있을까. 나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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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회사를 그만둬야 하나, 서늘한 고민을 하면서, 그 분들을 떠올렸다. 거의 임사체험처럼 반쯤 회사를 포기한 상태에서 냉정하게 돌아본 나 자신은, 역시 바깥세상에서 생존이 어려운 존재였다. 그걸 깨닫고 다시 바라본 세상은 전과 같지 않다. 경인방송의 여러분들이 맞닥뜨린 세상이 어떤 것일지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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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일을 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그 일만 해야 하는 것으로 운명지어졌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모든 능력, 모든 기관은 퇴화해서 흔적뿐, 남은 재주라고는 그저 방송 하나인 것처럼 말이다. 쓸쓸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 그 남은 재주가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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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로 밀려난 방송인들의 그 중요한 ‘재주’가 다시 잘 쓰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좋은 세상을 만드는 데 그 재주가 도움이 된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된다면 나도 우물 앞에서 고무신 벗을 생각 같은 건 다시는 하지 않아도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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