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듀서의 세상보기 두번째- 세계질서 재편과 신자유주의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피에르 부르디외의 ‘맞불’ - 세계 지식인이여 저항하라
누가 신자유주의를 찬양하고 있는가
만국의 참여지식인이여 대항하라

|contsmark0|● 연재순서1. 신자유주의의 논리와 imf2. 신자유주의와의 투쟁 - 멕시코로부터 온 편지3. 피에르 부르디외의 ‘맞불‘ - 세계 지식인이여 저항하라
|contsmark1|
|contsmark2|피에르 부르디외는 현재 꼴레쥬 드 프랑스의 교수로 쟈끄 데리다와 함께 프랑스 지성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95년 이래로 그는 비판적 지식인 그룹인 ‘행동하는 이성’을 이끌며 신자유주의에 맞서왔다. ‘맞불‘(contre - feux)은 92년부터 98년초까지 그가 쓴 여러 글들을 묶어 팜플렛 형식으로 출간한 것이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대재앙’이 임박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이 책을 발간하게된 계기라고 서문에서 말하고 있다.‘맞불‘은 현재 프랑스 베스트셀러 10위안에 들어있으며 본지의 글은 지난 ‘월간 사회평론 길’ 7월호에 실렸던 내용을 요약, 재수록한 것이다.<편집자>
|contsmark3|
|contsmark4|수세기에 걸친 사회적, 지적 정치적 투쟁의 숭고한 결과물인 노동자들의 노동권, 사회보장약속같은 제 권리가 위협받고 있다. 이 권리들을 지키고자 하는 움직임이 지극히 정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일부에서는 이것을 시대에 뒤떨어진 행동 더 나아가서는 ‘노동귀족의 기득권 지키기’ 정도로 폄하하고 매도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의 근원에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자리잡고 있다.
|contsmark5|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주입된다 현재 신자유주의는 공산주의 몰락 이후 전지구적 유일사상으로 우리 위에 군림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된 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언론과 일단의 지식인의 부단한 상징조작적 프로퍼갠다가 작용해왔음을 알 수 있다. 지속적이고도 가공할만한 주입이 결국 신자유주의를 하나의 믿음으로까지 발전시킨 것이다. 이제 우리 (비판적) 학자들이 해야 할 일은 분명하다. 하나의 허위의식에 불과한 신자유주의적 담론이 어떻게 생성되고 유통되며 당연한 것으로 주입되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프랑스의 언론들은 주기적으로 미국이나 영국의 (신자유주의에 의한) 경제적 ‘기적’을 보도하고 있다. 이러한 ‘가랑비에 옷젖기’식의 상징조작은 신자유주의를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이 시대의 필연인 것처럼 주입시키는 엄청난 효과를 낸다. 예를 들어 어떤 기업이 2000명을 해고한 것에 대해 ‘용기 있는 구조개혁’이라는 찬사를 붙이며 탄력성, 유연성, 규제철폐 같은 단어의 조합과 함축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메시지가 인간해방의 보편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만든다.세계화는 복지국가의 이름으로 성취한 사회적 제 권리를 파괴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요무기이다. 세계화의 이름으로 최저 생계비제도가 없는 나라, 노동조합이 없는 나라, 아동노동을 시키는 나라의 모델을 복지국가의 노동자에게 적용시키려 하며 모든 사용자들이 꿈에 그리는 자의적인 노동의 탄력성을 강요한다. 신자유주의는 첨단적이고 현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외피 아래 케케묵은 사용자의 흘러간 꿈을 되찾아 실현시켜 주려고 한다. 성장, 합리성, 과학(특히 경제학)의 구호아래 복고를 합리화하며 진보적 사상과 행동들을 오히려 낡은 것으로 매도한다. 또한 모든 생활행위를 시장의 원리, ‘강자의 원리’아래 묶으려 한다. 금융시장의 지배를 신격화하며 이익 극대화의 철칙 외에는 아무것도 인정치 않는 브레이크 없는 자본주의이데올로기이다.영국의 대처리즘은 처음에는 노동자계층, 다음에는 중산층에까지 엄청난 불안과 자괴감을 불러일으켰고 수많은 임시고용과 저임금고용으로 실업률을 억지로 낮춰 발표하고 있는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나라에서 임시 노동인구가 늘고 있으며 노동자가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평생직장, 건강, 퇴직수당-는 박탈당하고 있다. 프랑스는 신규고용인구의 75%가 임시직이다. 이러한 불완전 고용은 결국 범죄율의 증가 같은 악효과와 이에 따른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초래한다.
|contsmark6|세계화는 기만이다세계화라는 말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유토피아를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신화에 지나지 않지만, 그중 가장 구체적인 사실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면 금융시장의 세계화이다. 국가단위의 법적 규제장치의 해제와 통신 수단의 발전에 따른 국가간 커뮤니케이션 비용의 감소로 인해 점점 세계적으로 통일된 자본시장이 형성되고 있다. 이 시장은 몇몇의 경제강국, 즉 자국통화를 세계자본 시장의 기준통화로 사용하는 나라의 지배하에 있으며 종국적으로는 게임의 규칙을 미국이 결정한다. 결국 세계화란 세계자본시장의 동질화 과정이 아니라 소수의 지배국가들이 다른 국가들의 국내자본시장에 지배력을 확대하는 과정에 다름아닌 것이다. 개개 국가의 국내 자본시장의 자율성은 축소되는데 특히 국가가 자국의 환율과 이자율을 스스로 결정을 못하게 되고 경제정책결정과정이 소수지배국가의 손에 넘겨지게 된다. 개개 국가들은 항상 국제 투기자본의 위험에 노출된다.
|contsmark7|새로운 국제연대를 위하여무엇을 해야할 것인가. 우선 경제정책 결정과정에서 사회비용의 문제를 절대적으로 제기해야 할 것이다. 대량해고가 장기적으로 고통, 질병, 자살, 알코올중독, 마약복용, 가정폭력 등의 형태로 얼마나 엄청난 사회비용을 야기시키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제기를 해야한다. 또한 현상태에서 지식인, 노동조합, 시민단체의 투쟁은 (복지)국가의 소멸을 방지하는 데 모아져야 한다. 국가는 지금 밖으로부터는 국제자본의 힘, 안으로부터는 그 것의 공조세력인 국내자본과 소위 작은 정부의 미명하에 움직이는 고위 경제관료에 의해 잠식되고 있다. 이러한 제 세력으로부터 복지국가를 지켜내야 한다. 또한 (유럽적 차원이지만)개별국가의 노동조합들도 연합하여 초국가적인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국제자본의 힘이 초국가적 차원에서 행사되기 때문에 이 곳에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대항하기 위한 실제적 역량을 갖춘 국제적인 조직적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급선무이다.어떻게 새로운 국제연대의 기초를 세울 것인가.첫째 민중동원의 차원인데 우선 기존 언론의 지속적인 신자유주의 주입작업으로 인한 민중의 동원역량 약화와 사기저하를 방지하는 역할을 지식인들이 수행해야 한다. 우리가 날마다 모든 대중매체를 통해 접하는 ‘지구촌’, ‘세계화’라는 말은 얼핏 별 깊은 뜻이 없어 보이지만 그 뒤에는 운명, 필연성, 복종을 유도하는 신자유주의의 가공할 이데올로기가 숨어있다. 이런 대중매체의 숨겨진 세뇌작업을 저지할 수 있는 지적 언어적 도구를 연구하여 민중에 전파하는 것이 학자, 그리고 진보 언론인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민중동원의 사회적 기반은 존재하고 있다. 교육수준의 향상과 이로 인한 학위의 희소가치 소멸에 따른 학위의 평가절하가 대학생과 일반 육체노동자의 신분적 격차를 줄여주고 있어 민중동원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현재 진행되는 중산층의 급속한 축소와 소득 불평등의 증가 또한 대규모 민중동원의 사회구조적 기반이 된다. 이러한 국제 민중동원의 성공적 수행을 위해 지식인들이 해야할 역할은 이른바 ‘지식전투’이다. 다시 말해 신자유주의 지지자들이 제시하는 허위 통계수치와 영·미의 완전고용에 관한 기만적 신화를 깨뜨리는 일이다.둘째로는 범국가적 차원의 복지국가 설립의 기초를 만드는 일이다. 현상태에서 단위 국민국가는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비전의 부재로 인해 공동체정신에 입각한 공공선을 실현할 능력이 결핍되어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국민국가 단위로서 이미 획득한 사회적 제 권익을 수호하고 강화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각국의 가장 진보된 제 권리를 축적하여 하나의 새로운 범국가형태의 기초를 쌓아서 통일된 자본시장을 이 기구의 통제하에 두어야한다.
|contsmark8|능력 논리의 함정대다수의 지식인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거나 회피, 심한 경우는 공조를 하기도 한다. 일부의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학자인 척하는 게임에만 몰두, 이성이니 합리적 대화니 하는 말장난 수준의 방어에 연연하거나 포스트모더니즘의 변종격인 ‘이데올로기 종말의 이데올로기’를 요즘 잘 나가는 사상으로 상품화하면서 진보적인 사회변혁사상을 생매장하고 니힐리스트적인 저주를 일삼고 있다.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신사회적 다윈이즘에 기초하고 있다. 하버드 대학 식의 ‘승자는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라는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능력있는 자는 좋은 직업을 얻고, 그렇기 때문에 실업자는 무능력자라는 것이다. 능력의 이데올로기는 주인과 노예의 이분법적 시각을 정당화시키는데 상당히 적절한 사상이다. 한쪽에는 능력을 갖추고 국제노동시장에서 초고액의 연봉을 받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임시고용과 실업이라는 양자택일의 운명에 처한 대다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당연시한다.막스 베버는 지배자들은 항상 ‘특권의 형이상학화된 신학’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즉 그들이 특권을 가질만한 계층이라는 점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논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능력의 논리’는 바로 이 특권계층의 논리와 다를 바 없다.오늘날 왜 우리는 지난날의 참여지식인 시대에서 탈참여지식인 시대로 퇴보하였는가. 이에 대한 부분적인 설명은 ‘지적자본’의 소유자로서 지식인들이 지배계층내에서는 하위에 있지만 그래도 지배계층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들 대다수는 학벌에 기초한 능력이데올로기 속에서 한편으로 혼란스러워하면서도 내심 동조하며 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contsmark9|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