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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무대>를 조연출할 때의 일이다. 시청자의 일기를 모아서 낭독하고 관련 노래를 듣는 기획을 준비할 때, 평생 동안 일기를 써 오신 할아버지 한 분을 알게 되었다. 8절지 크기의 종이를 철해서 10줄로 줄을 그어서 한해마다 한 칸씩 하루하루의 일기를 채워 넣은 일기장에는 50년 전 당시의 월급수준, 물가수준, 생활 풍속 등이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일기는 그 자체로 생활 박물관이었으며, 역사의 기록에 다름 아니었다. 왜 일기를 써왔냐는 질문에 할아버지는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세상에 의지할 곳이 없어서 자신의 과거 경험에서 지혜를 얻기 위해 일기를 썼다고 말했다. 자신도 잊어버리는 경험을 글로 남겨서 어려운 선택의 기로에 설 때마다 참고했다는 것이다.제작을 하면서 수많은 선택에 부닥친다. 스태프들의 질문들에 PD들은 빠짐없이 대답해왔다. 하지만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질 때면 고민이 깊어진다. 주변 선배들에게 문의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답은 “네가 선택해라”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결과가 크게 다르지 않는 경우라면 몰라도 선택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진다면 PD의 선택은 중요할 수밖에 없다. 파급효과가 개인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에게 전달되므로 더욱 그러하다.왜 PD 핸드북은 없는 것일까?PD들 모두 공감하고 있지만, PD들이 선택의 기로에서 참고할 수 있는 기록이 적다. ‘스태프들과의 갈등이나 텃세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류의 고민을 해결해 주는 실용적인 기록이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에 PD들의 제작 핸드북을 제안한다. 기자들의 스타일북과는 달리 제작에서 경험한 다양한 실용적인 사례들과 해결방법을 정리한 책 말이다. 내용은 이런 것들이 되겠다. 야외 중계에서 비가 올 확률이 90%인 경우 공연을 취소해야 하나 계속해야 하나? 해외촬영 도중 카메라를 분실할 경우 그냥 돌아와야 하나? 카메라를 빌려서 녹화해야 하나? 어렵게 찍은 녹화테이프 원본을 지웠을 경우 복원시킬 방법은 없나?…. 수두룩하다. 선배들의 경험을 구술로든 문서로든 정리, 분류해 놓기만 해도 좋은 핸드북이 될 것이다.글 쓸 시간이 어디 있나?세상에서 가장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PD들임은 자명하다. 밥 한번 먹자고 했으나 먹지 못한 PD들이 얼마나 많은가? 바쁜 PD들에게 글쓰기는 도전이다. 얼마 전에 기획했던 프로그램 <낭독의 발견> 제목으로 책을 펴냈다. 주변에서는 바쁜 와중에 언제 책을 썼냐고 물어왔다. 실은 프로그램 시작에서부터 매주 녹화 때마다 틈틈이 출연자나 녹화에 대한 생각들을 프로그램 홈피에 올려놓은 것을 모은 것이다. 일기장이 아니어도 개인 홈페이지나 블로그 아니면 프로그램 홈피에 글을 써 놓아도 좋다. 중요한 것은 사이버상에만 남겨두지 말고 꼭 책으로 엮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기록으로 남고 참고자료로 기능하게 된다. 내 책을 내줄 출판사가 있을까?출판계가 불황의 회오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출판계가 은근히 기대하는 것은 영상문화와 활자문화의 결합이다. 원소스 멀티유즈의 효과를 누리겠다는 것인데 뉴미디어시대는 콘텐츠의 시대에서 인터페이스의 시대로 전환되는 때이기 때문에 바람직하다. 책은 같은 콘텐츠를 다른 방식으로 전달하는 또 다른 인터페이스이기 때문이다. 출판사들의 태도가 호의적이라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PD들 중에도 책을 내고 싶은 PD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머뭇거리는 분이 있다면 주저마시고 기획의도를 가지고 출판사의 문을 두드리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34명의 동료 PD들과 생각을 모은 책 도 출판사를 찾아가 협의하다가 기획한 것이다. 그래도 궁금한 내용이 있으시다면 필자에게 직접 문의하시기 바란다(hongks@kbs.co.kr). 무료로 컨설팅 해드릴 예정이다. 이제 막 프로그램을 끝냈거나 지금 열심히 프로그램을 만드는 PD분들, 그리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기 시작한 PD분들 모두 프로그램 이름으로 책을 펴내시길 기대한다. 방송 PD 한분 한분이 왕성한 문화생산자가 돼 방송을 둘러싼 문화가 풍부해지고 PD 문화에 윤기가 더해졌으면 좋겠다. PD의 운명은 결국 생산해야 할 그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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