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가 죽인 라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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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가 죽인 라디오?
  • 지웅 CBS 편성국 부장
  • 승인 2005.03.31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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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만 만들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 좋았던 시절의 방송은 요런 과정을 거친다. 기획과 준비, 그리고 방송. 깔끔하고 단순하고, 보편적이다.

대부분의 세상사들이 이런 과정을 거치는 게 아닐까? 계획과 준비, 그리고 실행의 세 과정인 셈인데, 요즘 방송 일, 특히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의 경우는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방송을 해 놓고서도, 후반작업도 아니고 피드백 점검도 아니고, 프로그램 홍보라고 하기도 적절하지 않은 ‘기사 만들기’ 또는 ‘방송 컨텐츠의 텍스트화’에 매진해야 하는 상황이다.

일제 침략에 대한 일부 인사의 ‘기발한’ 평가와 독도 문제 등으로 세상이 시끄럽던 어느 오후를 예로 들어보자. 문제의 ‘망언’ 주인공과 생방송 인터뷰를 했다. 주조정실에서 생방송 내용을 들으면서 스태프 가운데 한 명은 인터뷰 내용을 바로 컴퓨터에 쳐 넣는다. “일본에 먹힐 만했으니 먹혔지요.” 이게 웬 떡인가. 귀가 확 뚫리는 느낌이다.

거의 리얼 타임으로 ‘텍스트화’된 방송 내용은 약간의 편집과정을 거쳐서 한 시간 이내에 프로그램 홈페이지와 cbs 노컷뉴스에 거의 동시에 올라간다. 거기까지가 pd의 몫이다. 물론, 제법 큰 ‘껀수’가 걸렸을 경우에는 따로 보도자료를 만들어서 주요 언론사 담당 기자들에게 ‘좌악’ 뿌리기도 한다.

그 다음부터는 드디어, 포털사이트와 네티즌이 활약할 차례다. ‘섹시’하게 제목을 뽑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내용은 어쩌면 전혀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포털을 통해서 ‘가장 많이 본 기사’의 반열에 오르려면 제목만 있으면 된다. ‘땡기는’ 제목은, 괄호 속에 ‘내용무’라고 써 놓아도 많이 본 기사가 된다고 할 정도니. 그렇게 해서 수없이 많은, 그러면서 엄청나게 수명은 짧은, ‘가장 많이 본 기사’들이 탄생한다. 라디오 시사프로그램도 언제부턴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과정을 거쳐서 주요한 뉴스 콘텐츠의 공급원이 됐다.

그러고 보니 이런 내용 자체만으로도 멋진 제목을 달아서 기사 하나쯤 만들 수 있을 것도 같다. 뭐가 좋을까. “섹시 뉴스로 포털 점령?”

옛날, 좋았던 시절의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은 생방송 시간 그 자체가 전부이고 끝이었다. 바로 이 시간, 방송을 듣고 있을 청취자들만 생각하면 됐다. 지금 생각하면 우직한 집중력 같은 것이 제작자에게나 청취자에게나 다 있었던 시절인 것 같다. 번잡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인터넷과 모바일 서비스를 통해 리얼 타임으로 이뤄지던 때도 아니고 일희일비할만한 기동성도 순발력도, 필요성도 없을 때였다. 더 중요한 것은 라디오가 라디오 나름대로의 무게와 진실함을 가지고 있었던 때였다는 사실인지도 모르겠다.

인터넷과 케이블과 위성과 dmb까지, 새로운 방송 매체의 홍수 속에 지금, 라디오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제 전처럼 느긋하고 우직하게, 얼굴을 직접 대하고 있는 청취자들에게만 집중하기는 어려운 시대가 돼버린 것이다.
“나 여기 있어요, 이 쪽도 좀 들어주세요, 오늘은 이런 방송을 했답니다, 얼마나 재미있었다고요.” 요즘 라디오는 이런 애타는 외침을 까치발을 들고 해야 할 처지가 된 셈이다. 그래서 방송이 전파에 실려 전 세계의 라디오 안테나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그 순간에도, 청취자에게 집중하기보다는 오히려 포털에 깔릴 섹시한 기사의 제목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잠깐’ 우울해지는 pd들도 생겨나는 것이다. 역시 우울한 일이다.

문제는 인터넷 등 다른 매체를 향한 라디오의 이런 처절한 몸짓이 별 도움이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런 노력으로 특정 프로그램의 청취율이 눈에 띌 만큼 올랐다는 보고도 없다. 수준있는 방송의 콘텐츠는 오히려 ‘제목 꺼리’도 안 된다. 결과적으로 방송과, 우리 사회에 대한 일반의 인식에, 이런 식의 프로그램 홍보는 나쁜 영향만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이것도 기사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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