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의눈] 간이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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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D의눈] 간이역에서
  • 오정호 EBS 참여기획팀
  • 승인 2005.05.26 1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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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시계를 좀 더 오래 쓸 요량으로 잠자기 전에 배터리를 빼놓는 사람들이 있다면 좀 우스워보일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특급열차처럼 마구 달려가는 우리의 삶에서 의도하지 않았던 제동이 걸린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요. 무슨 말일까 하시겠군요. 요새 제가 할 말이 많았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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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어느 날 갑자기 왼쪽 눈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망막에 구멍이 생겼다고 했습니다. 이후 세 번의 수술, 한달여의 입원, 그리고 밤낮으로 바닥에 엎드려 있어야 하는 자세 등 예기치 않았던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점점 나아지고는 있으나 아직도 출근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글로 저의 안부를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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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동료와 선후배들이 전화로, 이메일로 저의 갑작스런 쓰러짐을 걱정해 주셨습니다. 격려와 희망, 다독거림의 말로 엎드려 있던 저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는 철저히 혼자가 됨을 느꼈습니다. 무력감과 침묵, 그리고 위태로운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 고통은 다양한 이름으로 엄습하기 시작했습니다. 눈을 다치고 보니 tv와 책, 컴퓨터 등을 볼 수 없는 것도 또 다른 고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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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48색 크레파스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던 어린아이에게서 두세 가지 색 크레파스만 남기고 모조리 앗아가 버리는 것이랄까요. 문득 거울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항생제와 진통제에 찌든 육신, 아주 희미하게 비치는 일그러진 내 모습, 운동부족으로 불룩해진 허리와 배, 병이 길어지면서 자기혐오라는 마음의 병마저 생기더군요. 슬픔의 감정은 마치 스펀지 같은 것이어서 주위의 모든 슬픔과 고민까지도 빨아들이는 묘한 힘을 가지고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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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장난처럼 절망이 끝났습니다. “완전한 문장은 없어. 완전한 절망이 없는 것처럼”이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하늘이 천둥번개를 친 다음 노(怒)하는 것을 보았느냐, 언제 시체가 슬퍼하는 것을 본 적이 있더냐”고 했던 이성복의 글도 함께. 결국 어찌 보면 언어의 싸움이었던 것입니다. 고통의 언어와 희망의 언어 사이에서 저는 번민하고 주저하고 헤맸던 것입니다. 모두 다 제 가슴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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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엇보다도 저에게 희망을 주었던 순간이 있습니다. 병든 아들을 돌보기 위해 어머니가 고향에서 올라오셨습니다. 침묵의 동굴로만 숨어들려고 했던 아들에게 어머니는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어머니도 침묵과 무위의 시간을 함께 견디고 계신 듯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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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어머니는 누군가 버린 것 같다며 꽃도 잎도 없는, 앙상한 줄기만 남아있는 화분 하나를 주워 오셨습니다. 저는 왜 이런 것을 가지고 들어오셨냐고 짜증을 냈던 것 같습니다. 허나 매일 매일 돌봐 준 어머니의 사랑 때문이었을까요. 어느 날 희미하지만 제 눈에도 빨간 꽃 하나가 보였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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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습니다. 저의 이런 시련이 더 큰 상처와 절망을 겪고 있는 이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 자신이 달려왔던 철로에서 균열을 발견하고 녹이 슨 이음새를 물끄러미 보게 되는 심정은 묘합니다. 더 나아가 내가 어디로 달려가고 있었을까 하는 깊은 성찰의 시간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갑작스런 멈춤도 쉼의 의미를 가지고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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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멈춰 서있는 이 곳, 제 인생의 간이역이라 생각하겠습니다. 그리고 훗날 힘들고 지쳤을 때 이 노래와 함께 그 간이역 근처에 피었던 이름모를 빨간 꽃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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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여 고마워요 이렇게 많은 혜택을 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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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둔 두 개의 밝은 별, 그것을 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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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과 백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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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하늘 깊은 곳 별들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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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사람들 속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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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의 ‘인생이여 고마워요(gracias a la vida)’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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