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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기록을 남기는 일. 방송의 중요한 사명 중 하나이다. 10년 전, 광복 50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시간의 징검다리>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다. 광복 이후 지나온 50년 생활상의 다양한 모습들을 하나의 테마로 묶어 그 시대 화면과 함께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50, 60년대 모습을 담은 방송사 자료화면이란 게 있을 리 없었다. tv드라마 최초의 대히트작들인 <여로>, <꽃피는 팔도강산> 같은 70년대 방송화면은 그래도 좀 있겠지 기대하며 찾아봤지만 <여로> 마지막회 3, 4분가량이 건질 수 있는 전부였다. 한 마디로 한심한 수준이었다. 영상자료 보관의 필요성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개념도 없이 많은 경우 재활용되면서 수많은 당시 프로그램들이 영영 사라져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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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맹활약을 한 게 극장에서 영화상영 이전에 보여주던 ‘대한늬우스’ 화면들이거나 주한미군 공보처에서 찍어 놓은 필름화면들이었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유메틱 테이프 속에 그 화면들이 대부분 담겨져 있었다. 방송주제가 정해지면 유메틱 테이프를 평균 200개 정도 편집실에 쌓아놓고 프리뷰 겸해서 베타테이프로 복사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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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화면들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현재는 원로가 된 연기자들의 젊은 시절 모습이나 지금 보기엔 무척 코믹하지만 당시엔 최고로 세련되었던 각종 광고들, 그리고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당시 현장의 모습들, 이제는 사라진 인물이나 건물들이 화면 속에 펼쳐졌다. 보면서 대한뉴스를 만든 스태프들이 고맙게 느껴질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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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유신정권 아래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한 재조명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김형욱 전 중정부장은 어떻게 살해됐고 10·26 궁정동의 진실은 무엇인지 그동안 베일에 가려 있던 많은 일들이 방송을 통해 다뤄지고 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당시 자료 화면들을 보면서 새삼 기록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된다. 가끔 오락프로그램에서 예전의 코믹했던 쥐잡기 또는 산아제한 캠페인 화면을 방송하면 ‘저 그림들 내가 복사하고 편집해서 모아놓은 건데’ 하는 반가움과 뿌듯함이 들기도 한다. 그런 경험을 통해 방송을 한 편 낼 때마다 ‘괜찮은 화면들은 따로 모아서 영상자료실로 넘겨야지’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 공약으로 끝나고 만다. 그렇게 용도 폐기된 채 편집실 여기저기에서 굴러다니는 테이프들 속에 담긴 그림들이 먼 훗날에는 구하고 싶어도 없어서 못 보는 화면들일 수 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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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kbs 복도에는 아주 재미있는 영화포스터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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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영화나 드라마를 패러디해 만들어진 그 포스터들의 진원지는 kbs 영상자료실이다. 그 포스터들이 패러디 형식으로 재치 있게 전달하는 주제는 촬영원본이나 편집본의 영상자료실 이관이다. 그 포스터들을 볼 때마다 ‘아 이번엔 꼭 넘긴다’ 해놓고 아직도 책상 주변에서 불안한 동거를 하고 있는 테이프들이 꽤 있다. 마음 같아선 아주 꼼꼼히 화면내용을 정리한 메모와 함께 넘겨야겠단 욕심에 미루고 미루다 보니 점점 쌓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몇달 지나고 개편 닥쳐오면 자리 이동하고 그러다보면 하나, 둘씩 테이프들이 없어지는 악순환이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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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작했던 <낭독의 발견> 방송에 출연했던 사진작가 김영갑 선생이 지난 일요일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5년 전부터 루게릭병과 힘겨운 싸움을 해오던 그는 두달 전에 방송에 출연했었다. 그 방송이 사진과 제주도에 온 열정을 바쳐온 그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자료가 된 것이다. 이번에는 영상자료실 포스터의 외침에 적극 부응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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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봄, 그 치열했던 광주항쟁의 현장에서 계엄군의 살벌한 총칼을 피해 광주의 진실을 알리는 화면들을 외부로 전달한 어느 독일 언론인의 용기만큼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내가 촬영하고 편집한 화면들을 소중하게 활용할 후배 pd들을 위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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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하는데 방송pd야말로 이름을 확실히 후세에 남길 수 있다. 촬영하고 편집한 테이프들에 자기 이름 곱게 써서 영상자료실로 넘기면 되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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