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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일칼럼

이경규는 어디까지 가야하나 l승인1997.02.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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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오락프로그램의 ‘이경규가 간다!’라는 코너가 장안의 화제인 모양이다. 애초에는 코미디언 이경규씨가 각계 명사들을 무작정 찾아가 인터뷰를 하더니, 명사들을 만나는 것이 별 재미가 없었던지 최근에는 심야에 교통질서를 점검한다든가 하는 ‘숨은 양심을 찾아서!’라는 내용으로 탈바꿈했다. 이런 기획성 코미디가 오락프로그램 중에서도 단연 대중의 인기를 모으고 있는 모양인지, 아무튼 이 프로그램의 영향력은 대단해서, TV를 본 운전자들의 질서의식이 높아져 횡단보도의 신호나 정지선을 눈에 띄게 잘 지키게 되었고, 이윽고 서울시장이 이경규씨에게 감사패를 주기에 이르렀다. 나는 개인적으로는 이 ‘숨은 양심을 찾아서’라는 코너에 불만이 좀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남이 안 보는 데서도 질서를 잘 지키느냐 아니냐를 가지고 양심의 유무를 판단하는데, 그처럼 단순히 ‘법은 지켜야 한다’는 명제만 반복적으로 강조할 경우, 자칫 ‘법은 합리적이어야 한다’는 또 하나의 명제를 망각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교통질서를 예로 들어, 합리적인 신호체계가 전제된 다음에 그 준수여부를 따져야 한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교통량이 극히 적은 심야에는 황색점멸등을 켜놓는다든지 해서 융통성을 주지 않는다면, 신호를 지키지 않는 ‘비양심자’들이 통계적으로 양산될 것이 뻔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나의 이런 사소한 불만에 전혀 관계없이, 이 프로그램 제작진은 앞으로 이 코너에 우리의 심각한 환경문제를 소재로 삼겠다고 선언했다. 워낙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암담한 분야인데다 그림마저 칙칙하기 쉬운 환경문제를 과연 오락프로그램에서 어떻게 소화해낼 것인가가 자못 궁금해지는 한편, 언제부터 오락프로그램이 사회계도 또는 사회개혁의 역할마저 떠맡게 되었으며 또 언제까지 그래야 하는 것인가를 묻게 된다. 행정부나 지방자치제의 해당 부서에서는 평상시에 무엇을 했고, 폭발적으로 늘어난 온갖 언론매체들은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길래, 오락프로그램의 꼭지 하나가 힘겹게 우리 사회의 이곳 저곳을 비춰주고 긁어주는 갸륵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는가 하는 말이다.‘의미있는 웃음’을 추구하는 연예오락프로그램의 어느 프로듀서 치고 사회를 계도하거나 개혁하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기획 연출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때로 피디들의 어깨에는 대중이 요구하는 어떤 역할이 묵직하게 얹혀지는 수가 있다. 피디로서는 일종의 즐거운 고민을 하게 되는 경우이겠으되, 이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대중매체의 한 부분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면서 사회개선의 기대감까지 함께 높아진다는 것은, 그 문제를 정말로 책임져야 할 사회의 구성부분이 제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반증일 수 있기 때문이다.환경문제를 다룬 후에 이경규씨는 숨은 양심을 찾아서 또 어디로 떠날 것인가? 개복수술을 하려다 그냥 덮어버린 듯한 한보사태를 확실히 규명할 숨은 양심을 찾아서 이경규가 가야 할 것인가? 이한영씨를 쏜 사람이 누구인지, 그를 쏜 총이 브라우닝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 위해서도 이경규가 가야만 할 것인가? 신문 방송에 뉴스량은 많은데 왜 진실은 좀처럼 밝혀지지 않고 사람들의 골머리만 아프게 하는 것일까? 기자들이 스스로 사건들의 진실을 밝혀낼 수는 없는 것인가?민주화가 완성되지 못한 사회, 게다가 언론이 변변치 못한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은 늘 억울하고 혼란스럽고 답답하다. 그래서 대중은 또다시 TV를 켜고 틀림없이 확실한 결말을 보여줄 코미디프로그램 속으로 이경규를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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