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대상<안기부, 북한 원전(原典) 인용보도 “문제없다”> 등 다수의 기사남북간 화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정일용연합통신 남북관계부 기자한창 ‘북풍’이 몰아칠 때 수상소식을 들었다. 처음 노조에서 추천한다고 했을 때 별달리 특출난 업적도 없는데 괜히 출품하는 것 아닌가 주저했다. 그런데 대상으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비가 뿌리고 ‘북풍’이 몰아치고 어쩐지 으시시한 날씨였는데 한 줄기 밝은 햇살을 본 것 같았다.북한을 화두로 붙잡고 지내온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면 우선 답답한 심정이 가슴을 짓누른다. 머리 속에 ‘북한’이 둥지를 틀고 있을 때면 어김없이 ‘왜 그리 엄숙한 표정이냐’고 핀잔을 받았다.대한 남아라면 누구든지 한 번씩은 거치게 되는 군 복무를 전투경찰대원으로서 제주도 해안초소에서 지냈다. 끊임없이 굼실대는 파도를 보면서 우리 청춘은 너무도 시린 가슴을 안고 산다고 생각했다. 말 그대로 용솟음 치는 나이에 뭐 할 일이 없어 이 일을 하고 있는가….항구 몇 군데와 공항만 막아버리면 어디로 샐 수도 없는 제주도에서 새파란 청춘들이 탈영이랍시고 섬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건은 지금도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는다. 이런 일이 어디 제주도에만 있었던 일이었던가.분단된 조국을 떠올리면 한숨이 절로 나온다. 분단 때문에 쏟은 눈물은 또 얼마나 될까…. 한숨과 눈물을 한꺼번에 쏟아 놓으면 태풍이 되고 홍수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제 아무리 거센 파도라 해도 밑바닥에서 도도하게 흐르는 해류에 비하면 한갓 찰랑거리는 물결에 불과하다. 파도가 해류를 바꿔놓을 수 없듯이 남북간의 화해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다. 조금이라도 더 앞당기고 시간을 아끼자고 이렇듯 아둥바둥하는 것 아닐까.통일 언론상 특별상 또 오보를 만들어 내서는 안된다이용석MBC 교양제작국 PD“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말 한 마디의 사실 여부에 초점이 맞추어진 이번 방송의 파장은 나의 예상을 간단히 뛰어넘고 말았다. 방송 이후 조선일보 기자 세 명이 ‘떼’로 나를 취재하러 오고, 며칠 뒤 장장 4면에 걸친 다분히 감정적인 대규모 보도가 나가고, 다른 매체에서는 또 그에 대한 반박이 이어지고….하지만 당초 “언론오보를 다루는 과정에 우리가 또 오보를 만들어내면 안된다”는 조심스런 다짐 속에 출발했고 당시 ‘조선 기자의 오보 여부’를 추측과 사견을 배제하고 사실과 진실만을 토대로 접근하려 노력했다고 나 스스로 자신할 수 있었다.이번 방송이 매체간의 상호비평의 장을 연다는 의미나, 한 주요일간지를 중심으로 한 안보상업주의를 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방송 자신도 오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현실에서 정확하고 공정한 방송을 다짐하는 선언적 의미도 함께 담겨야 된다고 생각했다.꼬리에 꼬리를 문 듯한 반박기사의 홍수가 잠잠해지고 잊혀질 만할 때에 수상 결정 소식을 접하게 됐다. 성수대교 붕괴, 삼풍백화점 참사 보도에 버금가는 양의 지면을 할애해 반박한 조선일보 기사를 보고 ‘자식이 무슨 큰 죄라도 저지른 건 아닐까’ 걱정스러워 하시던 나이드신 부모님께 그게 아니라는 걸 ‘객관적’으로 말씀드릴 수 있는 확인도장을 받은 것 같아 기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그 말 한 마디에 대한 논란이 일부 일반인들에겐 무장공비들에 의한 일가족 참사 자체의 존재여부 논란으로 확대해석됨으로써 승복 군의 형 학관 씨 가족에게 또다른 아픔을 남긴 것 같아 송구스러운 마음이다. 분단의 장벽에 박힌 벽돌 한 장이라도 깨야지권문혁MBC 교양제작국 PD상의 속성이 원래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따로 있고 ‘받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 나는 그저 ‘받는 사람’의 부끄러움을 감수하고자 한다.상을 받을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받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이 ‘통일언론상’의 권위와 가치가 워낙 높고 소중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상을 받고 싶은 마음이 수치심을 눌렀다고 말하는 편이 옳은 듯하다. 이제 ‘통일언론상’을 받았으니 분단의 장벽에 박힌 벽돌 한 장이라도 내 손으로 깨야 하지 않을까?상을 받으면서 우선 <긴급보고-북한 아이들이 죽어가고 있다>편의 취재대상이었던 탈북소년들에게 더욱 미안하고 괴로운 마음이 든다. 지금도 중국과 조선(북한)의 변방지대의 싸늘한 날씨 속을 헤매고 있을 탈북소년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저려옴을 느낀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함께 짊어질 그 어린 소년들이 단순히 먹고 잘 곳을 마련하지 못하는 현실을 어찌 우리가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나는 도무지 아직도 납득할 수 없다. ‘생존’ 자체를 위협받는 가혹한 고난이 바로 우리와 피를 나눈 동포들에게 가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제발 우리 남한의 국민들과 위정자들, 그리고 세계가 제대로 체감하고 해결하는데 나서 주기를 기대해 본다.실제로 프로그램이 방송된 후에도 그들에게 아무런 혜택이나 대책이 나오지 않아 일종의 허탈감과 공허감에 휩싸인 바 있다. 지금도 우리 정부의 탈북자 대책은 여전히 ‘무대책’이다. 앞으로 얼마나 많은 탈북자들과 탈북소년들이 희생될 지 알 수 없다. 30만에 이른다는 탈북자들을 고통 속에 그냥 방치하면서, 또 몇백만의 조선(북한) 주민들이 굶어죽은 후에 ‘통일’이 이루어지면 무슨 소용인지 나는 사람들에게 자꾸 묻고 싶어진다., 내 마음 속에는 3명의 미란다가 살고 있다김영호MBC 교양제작국 PD1966년 미국 아리조나에서 에르네스토 미란다라는 사나이가 유괴·강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그는 묵비권이나 변호사 선임권을 사전에 전혀 통고받지 못한 상태에서 자백을 했고 서명을 했으나 법정은 자백을 받아낸 절차가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적법해야 한다는 미란다 원칙은 이 사나이로부터 비롯됐다. 방송 역시 결과뿐 아니라 절차와 방법까지 소중히 여기는 미란다 원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 속의 미란다는 그렇게 살고 있다.셰익스피어의 희곡 ‘템페스트’에는 밀라노 영주의 자리를 빼앗긴 채 섬에서 은거하는 프로스페로공과 그의 딸 미란다가 나온다. 미국의 정치학자 C.메리엄은 ‘템페스트’에 나오는 딸 미란다의 이름을 빌어 정치권력과 피통치자의 관계를 설명한다. 즉 권력의 정통성을 이성에 호소하는 크레덴다와 구별하여, 미란다는 정치권력이 피통치자의 정서에 호소하는 것이다. 그래서 권력을 신성화시키고 미화시킨다. 내 마음 속의 두 번째 미란다는 권력의 미란다로부터 자유로운가를 끊임없이 묻는다.영국의 소설가 존 파올즈의 소설 ‘콜렉터’의 납치된 여자 미란다. 나비채집과 같이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부정하는 일에 탐닉해 있는 영국 부르조아 계층의 남자에게 납치당한 뒤 지하실에 갇혀, 한 마리의 나비 표본과 같이 그의 손에서 버둥거리다가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미란다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계층간의 위화감과 갈등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1960년대 영국의 사회상을 우화적으로 다룬 ‘콜렉터’의 미란다가 1990년대 한국 대학로 뒷골목에서 옷을 벗어버린 채 선정적인 연극의 주인공 미란다로 다시 등장한다. 내 마음 속에 있는 또 하나의 미란다는 ‘콜렉터’의 미란다인지, 의식없이 몸만 남은 선정적인 미란다인지 그렇게 선택을 강요한다.부족한 작품에 과분하게도 통일언론상을 주신 여러분께 감사의 말을 드린다.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