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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꺽정> … 양반계급 수탈 자세히 묘사해 저항 정당성 비중
<임꺽정> … 인간의 애틋한 정 표현 ‘드라마’ 부분에 강점
북한 프로그램 공개로 긍정적 효과 기대

|contsmark0|손병우 충남대 신방과 교수
|contsmark1|우리 방송을 통해서 두 번째 북한 프로그램인 <림꺽정>을 8부까지 보고 이 글을 쓴다. 북한 문제에 대해(그들의 문예이론까지 포함하여) 전혀 전문가이지 못한 필자이기에 다만 시청 감상 수준에 머물게 되겠지만, <림꺽정>을 보면서 그리고 이 시청소감을 쓰면서 북한 프로그램 시청과 관련하여 몇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우리 방송을 통해서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에 이어 두 편째가 공개되었고, 필자 개인적으로는 몇 년 전 북한 방송 관련 프로젝트에 참여하면서 당시 북한 방송 프로그램들을 일부 모니터한 적이 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하여 필자를 한 명의 모델 시청자로 놓고 볼 때, 북한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 우리에게 어떤 공통된 태도가 나타날 것 같다는 생각이다.첫번째 반응은 “에이, 별 거 없네”일 것 같다. 우선은 생전 처음 본다는 데에서 호기심이 발동하지만, 볼수록 썩 매혹적이지는 않고, 시간이 더 지나면서는 지루한 감마저 들지 않았을까 싶다. <림꺽정>에는 세 명의 인민 배우와 두 명의 공훈 배우가 출연한다. 말하자면 이른바 스타들이 대거 등장하고 있는 셈인데, 워낙 스타 시스템이라는 것이 텍스트 주변적 자료들의 도움을 입어야 구축되는 것이라서, 그 배우들과 이 영화 그리고 감독 등등에 대해 사전에 전달받은 내용이 없으니 그런 스타들의 위광이 발휘될 토양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선망이나 동경심이 형성될 여지가 없다. 이 점이 <림꺽정>으로 하여금 남쪽 시청자들의 취향과 텍스트 자체로만 승부를 벌여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으리라. 또, 문화물들에 대해서 이념적으로 꽤 자유주의적인 시청자들에게만 국한하더라도, 과거 체제 문제로 문화 텍스트마저 접촉이 불가능하던 시절에는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있다는 상황의 긴장감이 감상자들의 내면을 더 고양시켰을 텐데, 이 두 프로그램은 공중파 방송을 통해서 전달되고 있으니 전혀 금단의 열매라는 희소함과 금제를 위반하고 있다는 특권 의식의 도움도 받기 어렵다. 마찬가지 이유에서 주체 사상을 추구하는 시청자들에게도 이번 시청이 어떤 사상적 수혈로 여겨지지 못할 것이다.두번째 반응은 위와 정반대의 경향이면서도 시청자 내면에서 공존하고 있는 미묘한 것이다. 비록 북한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별 거 없다는 생각과 더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 그것이 ‘북한’ 프로그램이라는 쪽으로 마음이 쓰인다는 점이다. 즉, 이야기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보다 북한의 이념적 지향과 연계하여 그 프로그램의 목적성과 의도성을 집어내려고 하는 심리 상황이 함께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령 <안중근…>의 경우, 체제(일제)에 대한 개인적인 저항의 한계를 인식하고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저항의 핵으로서 이른바 ‘수령’의 중요성을 제기하고 있다는 평가에 대해 꽤 그럴듯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림꺽정>을 바로 그런 맥락의 연장선 위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태도가 있었다. ‘수령’의 ‘영도력’이 발휘할 수 있는 위력을 인민들에게 가르치려고 제작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시청 내내 불쑥불쑥 밀고 올라왔다. <임꺽정>이나 <홍길동> 아니면 무수한 영웅적인 풍모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드라마들을 보면서는 전혀 ‘수령론’ 같은 것이 떠오른 적이 없었는데 말이다. 물론 과거 <설중매>를 보면서 군사 쿠데타의 정당성을 선전하기 위한 혹은 거기에 아부하기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평하던 습성이 북한 프로그램에 대해서도 여지없이 발동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그런 남쪽 시청자로서의 편향성을 인정하고 sbs의 <임꺽정>과 북한의 <림꺽정>을 비교하면 몇 가지 차이가 드러난다. <림꺽정>에서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양반계급의 수탈이 꽤 자세히 묘사되고 있다. 양반계급의 수탈과 기만으로 인한 극도의 배신감과 분노가 청석골로 들어가 전면 항거에 나서게 되는 동기로서 아주 설득력있게 표현되었다. 그에 비해 <임꺽정>은 긴 분량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회 구조의 불평등에 기인한 계급 갈등과 지배 계급의 야수적 행태에 대해서는 표현이 미약했다. 대신 그 긴 분량을 인간의 애틋한 정을 묘사하는데 할애하였다. <임꺽정>에서는 각 두령들의 나름의 사연들이 대부분 아낙을 맞이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이런 ‘드라마’의 부분에서 특히 강점을 보였다. 이런 차이는 <임꺽정>에서 곽오주가 죽은 아이를 품에 안고 환청에 시달리는 에피소드를 강조한 데 비해 <림꺽정>에서 그런 심리적인 측면이 아예 없다는 데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하지만 지금 비교한 이런 측면은 남쪽과 북쪽이 모두 각기 장점으로 평가받을 만하다.그밖에 <림꺽정>에서는 하나의 테이크로 줌 아웃과 인을 연속해서 구사하는 쇼트들이 자주 눈에 띈 데 비해 <임꺽정>은 주로 커트로 장면을 이어간 점도 다르게 보였다. 그것이 각기 자극적인 묘사를 통한 과장과 긴박한 상황도 산뜻하게 표현하는 차이로 우선은 여겨지는데, 물론 더 면밀한 분석이 필요한 영역이다.그리고 <림꺽정>에서는 양반들에 대한 응징 장면에서 양반들을 희화화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비굴한 표정도 그러려니와 홍콩 액션을 방불케 하며 날아간 양반들이 방문이나 병풍, 심지어 담장과 함께 쓰러지도록 과장되이 장면을 설정한 것들이 그런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하나 더. 림꺽정이 두령들 회의를 주재할 때면 늘 그 뒤에 아들이 서 있던데(<임꺽정>에서는 못 본 장면들이다), 거기에서 자꾸 ‘후계론’이 읽힌 것은, 이 또한 음모론적인 습성 때문이었을까.하여간 이렇게 북한 프로그램을 자꾸 보는 것은 좋은 점이 더 많은 것 같다. 우리 방송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남쪽의 눈으로 북을 보게도 되지만, 그 다음에는 다시 북과 비교하여 남쪽 프로그램을 더 풍부한 각도에서 보게되는 것 같아서 그렇다. 이렇게 시청자와 제작자들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북한 프로그램의 일반 공개는 분명 방송사의 역사적 결단임에 틀림없다.|contsmar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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