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디의 눈] 너희가 비정규직을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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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운명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씩씩하고 튼튼하고 교양 있게 자란 이 젊은이. 똑같이 프로그램을 맡아 똑같이 방송 일을 하지만 그는 비정규직이다. 연출 홍길동, 이라는 자막은 차별 없이 나가지만, 그래서 시청자들은 그가 만든 프로그램이 비정규직 프로듀서에 의해 제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없지만, 비정규직의 문제는 방송사에서 여전히 ‘정규 문제’다.

pd야 사실, 다 비정규직인 것이나 다름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퇴근 시간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일한 만큼 또는 수고한 만큼 잔업 수당을 챙기는 것도 불가능하고 정규직다운(!) 권위도 갖기 어려운, ‘쟁이’에 불과하다는 자조 섞인 푸념 같은 것이었다. 얼마나 철없는, 배부른 투정이었던가.

cbs에서는 최근 여섯 명의 pd들이 비정규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상처 없이 넘기 힘든, 높고 험하고 지루한 고개를 넘어선 끝이다. 힘든 과정을 참고 견디어낸 그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한편으론 약간의 안도도 느끼게 되는, 복잡한 심정이다.

cbs tv의 개국과 함께 시작된 비정규직 pd 문제는 다른 방송사의 그것과는 또 다른 성격이다. 처음부터 비정규직임이 명확하게 구분된 상태에서 진행된 채용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에, cbs의 상당수 비정규직 pd들은 자신들이 비정규직임을 입사 후 한참이 지나서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이 귀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식스센스(sixth sense)>의 브루스 윌리스 같은 느낌이 아니었을까.

이번에 정규직으로 전환된 pd들은 한결같이, 기쁘기만 한 표정은 아니다. 회사와 동료들에 끝없이 감사만 하기에는 그 동안의 아픔이 컸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비정규직으로 남아 있는 동료 pd들이 아직 많기 때문이다. cbs는 3년에 걸쳐서 비정규직의 70퍼센트를 정규직화하기로 로드맵을 확정지었고 이번 정규직 전환이 그 첫 단계다.

노사가 진지한 고민을 함께 해서 어렵게 만든 안이지만, 이번에 탈락한 동료들을 포함한 나머지 비정규직 중에서 30퍼센트는 결국 정규직 전환이 안 되는 것으로 규정돼 있다. 이건 또 어쩌면 좋은가.

사실 방송사만큼 비정규직이 상시적으로, 그리고 정규적으로, 많이 쓰이는 곳도 없는 것 같다. 매일 얼굴을 맞대고 함께 일하는 fd와 작가와 자료조사원과 vj와 리포터까지, 적게 받고 미친 듯 일하는, 그러면서도 정규직 전환 같은 건 전혀, 꿈도 꿀 수 없는 비정규 청춘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노동시장의 놀라운 탄력성에 감사 혹은 감탄만 하고 살아도 될까?

자신이 비정규직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황공해하며 살기엔 방송 환경 자체가 이미 너무 험해져 버린 게 아닌가 싶다.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느 날, 그 허울 좋은 ‘정규직’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브루스 윌리스처럼 깨닫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contsmar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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