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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인가, 보습인가?
전상우
<한겨레신문사 판촉부>

|contsmark0|“에그, 저걸 어째.”할머니는 또 안달이 난다. 할머니는 tv속의 배우들이 진짜 두들겨 맞고 얻어터지는 줄로 안다. 옆에서 아무리 설명을 해도 그때뿐이다. ‘극(drama)’이라는 개념은 할머니의 인식범위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할머니의 tv속에는 마치 옆집에서 일어나는 일인 냥, 또 하나의 현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냥 보고 있지 못하고 애가 탄다.어머니는 할머니가 보이는 반응에 참지 못하고 한마디한다.“아, 참. 어머니도. 저거 진짜 저 사람들이 저러는 게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어머니는 할머니가 보이는 안달만큼 할머니를 답답해하고, 그때마다 일 삼아 위와 같은 말로 가르쳐 드리지만, 해도해도 끝이 없다. 그러더니 언제부턴가 체념하신 모양이다.그런 어머니지만, 가만 지켜보면 실은 할머니와 별반 다를 바도 없다. 주말연속극을 보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집안일을 끝내고 tv앞에 떡하니 자리를 깔고 앉으면 그때부터 세상일은 ‘나몰라’라다. 하필 그 시간에 맞추어 아들이 귀가하면, 아들은 별 수 없이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든지, 직접 상을 보아 저녁을 먹는 수밖에 없다. 그 시간만큼은 어머니에겐 세상없는 아들마저 뒷전인, 신성불가침의 시간인 것이다. 아버지의 판잔도 들은체 만체, 드라마의 현실이 고스란히 어머니의 현실을 지배한다.이제 어엿한 한 아이의 ‘엄마’인 큰딸도 어머니와 점점 닮아간다. 어머니 옆에 퍼질러앉아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드라마가 끝이 나서야 퍼뜩 정신이 든다. “참, 내 정신 좀 봐. 이서방 올 시간이네.” 허겁지겁 집으로 쫓아가는 언니를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둘째딸. 물론 둘째도 어머니, 언니와 함께 그 드라마의 열렬한 팬이다. 그렇지만 둘째의 관심은 드라마가 전개되는 과정이나 그 속에 얼기설기 뒤섞인 인물들간의 관계보다 또래 여배우의 옷차림과 액세서리에 온 정신을 집중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그 옷을 입혀보기도 하고, 가방을 들어보게도 하며 입술에 저 립스틱을 칠해 보면 어떨까… 머리 속에는 수십가지의 ‘코디’가 주마등으로 지나간다. 다음날 친구들을 만나 설날드라마에서 본 옷과 장신구에 대해 한참 이야기한다. 문득 한 친구가 무슨 브랜드에 똑같은 옷이 있다는 둥, 똑같은 가방을 보았노라고 하면 친구들과 바로 의기투합, 그 매장으로 직행한다. 둘째에게 tv는 생활을 선도하는 둘도 없는 교사인 셈이다.손에 맞지도 않는 기다란 장갑에 머리에는 알록달록한 핀, 바지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하고 신발마저 벗겨지기 직전이다. 막내딸은 어제 쇼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요즘 인기있는 10대 가수를 흉내내고, 신촌으로, 화양리로 이리저리 헤집고 다닌다. 고만고만한 애들이 고만고만한 목청으로 ‘우리는 같은 편이어요’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삼삼오오 짝을 이룬다. 그리고 그들만의 얘기로 꽃을 피운다.이렇듯 tv의 영향력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제 더이상 단순히 바보상자라고 격하할 수 없을 만큼 한 개인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네 생활패턴을 바꿀 정도의 막강한 힘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tv속의 유행이 바로 시대의 유행이 되어버리고, tv가 보여주는 생활양식이 하나의 생활표준 또는 양식이 되어 무의식중에 우리에게 그것에 맞출 것을 강요한다.그래서 나는 tv를 무기인 동시에 보습이라 생각한다. 무기로 오용된다면 그 영향력과 파괴력은 실로 우리의 정신을 황폐화시키고도 남을 것이고, 보습으로 쓰임을 다한다면 우리의 삶을 훨씬 풍요롭게 할 것이다.자,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tv는 무엇인가? 무기인가, 보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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