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따져보기] 현대생활백수의 종영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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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따져보기] 현대생활백수의 종영에 부쳐
  • 관리자
  • 승인 2006.05.24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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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눈에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게 사람이다. 눈에 빤히 보이는 데도 믿지 않는 것이 또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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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실업이 문제가 되고 있다는 소리를 듣는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상당수는 장차 문제가 되고 있는 고학력 청년실업자가 될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 처지가 아니고 보니, 또 그 처지에 처한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볼 기회가 없다보니, 그 심각성이란 단지 신문에 오르락내리락하는 숫자나 관념적인 문제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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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말의 imf 구제금융은 우리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아마 그 가운데 가장 극적인 대조를 보이는 두 존재-현상이라면 아마 ‘벤처’와 ‘백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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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대의 백수 혹은 폐인 비슷한 청년들이 일궈낸 ‘벤처’라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와 성공의 신화와 그저 이 사회의 한 아웃사이더라고 하기엔 이미 그 규모가 장난이 아니게 된 ‘백수’의 세력화(?) 말이다. 소위 닷컴 기업으로 성공한 젊은 자본가들에게 ‘백수’란 밤낮을 컴퓨터에 매달려 씨름하던 과거에 대한 기억일지 모르지만, 현재형의 백수들에게 그것은 하나의 형벌과도 같은 치욕스런 이름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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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90년대 imf 구제금융기를 거치며, 대량 양산된 젊은 실업자들은 소위 ‘폐인’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남으로써 백수에 새로운 문화적 의미를 부여하는 지경에 다다른다. 사실 백수란 적극적 구직자가 아니라, 구직에 소극적인 실업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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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구직에 소극적인 까닭은 무엇보다 적극적 구직에 따르는 지출과 경비를 이러저러한 이유로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폐인’은 혹은 그것의 다른 이름인 ‘백수’는 한편으로 계급적인 이미지를 품어 안고 있는 것이다. 적어도 부르주아의 자식들이 백수가 될 일은 없지 않겠느냐 말이다. 그러므로 폐인의 문화는 우리 시대의 가장 전형적인 ‘하위문화’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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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컵라면만 있으면 백수생활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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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백수들의 문화를 ‘현대생활백수’는 참으로 절묘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백수 고혜성의 촌스러운 파란색 트레이닝복 특히 그 가슴팍에 박아 넣은 태극기의 절묘함, 적당한 길이의 덥수룩한 수염과 며칠 동안 물 구경을 못한 듯 떡이 진 머리카락, 아무래도 하루 종일 집안을 뒹굴며 무료하게 시간을 때웠을 성 싶은 권태와 무기력, 아무 예식장이나 들어가 하객 행세를 하며 끼니를 해결할 법 싶은 뻔뻔스러움, 그리고 그 뻔뻔스러움이 굳게 버텨주고 있는 궁상. 하지만, ‘현대생활백수’의 백미는 ‘대한민국에 안 되는 게 어디 있니?’라는 대사이다. 백수에게 대한민국은 무소불위의 모든 가능성을 가진 나라다. 단지 한달 4만 5000원 초고속 인터넷에 접속할 네트워크 비용만 지불할 수 있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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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들의 생활이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부분의 백수들이 그 긴 하루―그들에게는 하루가 특히 길다―를 견딜 수 있는 건, 그들의 냄새나는 골방이 네트워크를 타고 세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만화가게, 당구장, 기원, 어린이 놀이터 등을 전전하던 과거의 백수들과 다르게, 요즘의 백수들은 집 안에서 모든 걸 해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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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등장하고 한 때 외부와 차단된 공간에서 인터넷으로 모든 생활을 꾸려나가는 이벤트들이 유행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 우리나라의 폐인들이라면 어렵지 않게 우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인터넷이 연결되는 컴퓨터와 컵라면만 준비되어 있다면, 우리의 백수는 가상공간 속에서 모든 것을 이뤄낸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초고속통신망으로 접속하는 대한민국은 ‘안 되는 게 없는’ 모든 가능성의 제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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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생활백수’는 우리 삶의 한 단면을 잘 드러내는 의미 있는 코미디였다. 하지만 그것은 처음부터 걱정스러운 코너이기도 했다. ‘현대생활백수’를 처음 본 그날 크게 감동을 받았지만, 오래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안 되는 게 없는’ 대한민국 백수들의 삶이 사실은 권태롭고 지루한 삶의 연속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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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서 실현하지 못한 모든 능력을 보상받고 그로부터 새로운 희망의 근거를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현실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 보상과 희망을 손으로 잡을 수 없다. 주문하는 메뉴만 바뀔 뿐, 늘 똑같은 대사에 똑같은 상황이 펼쳐지던 ‘현대생활백수’의 지루함은 어떠한 면에서 그러한 백수들의 삶 그 자체였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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