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겹쳐보기] 권위를 깨는 또 다른 권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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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빈(BEAN)> vs 피임약 광고

권위를 깨는 일은 즐겁다. 멜 스미스의 영화 <빈>(1998년 작)과 케이블 tv를 통해 19일부터 방영 중인 피임약 광고는 ‘고급예술’이라는 권위의 철옹성과 ‘기성세대’의 고정관념에 도전한다는 데서 즐겁다. 그간 일간지나 잡지 등 지면광고만 가능했던 피임약과 콘돔에 대해 tv광고가 허용된 것은 올해 1월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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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모았던 영국의 tv시리즈 <미스터 빈>을 극장용 영화로 만든 작품이다. 주연배우 로완 앳킨슨의 특수효과에 가까운 표정연기로 영화 역시 큰 성공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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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영국 왕립미술관 직원인 빈이 5천만달러짜리 ‘휘슬러의 어머니’앞에서 재채기를 하면서 꼬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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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튄 분비물을 엉겁결에 무지막지하게 닦아내다가 그림을 망친 빈은 고심 끝에 포스터를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작품과 같은 크기의 포스터에 약간의 처리를 거쳐 진품 자리에 붙여놓는다. <빈>은 배꼽을 뺄 정도로 황당하게 웃기는 황당한 슬랩스틱 코미디다. 그러나 영화는 명백히 권위를 깔아뭉개는 전복의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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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시민사회가 도래한 이후, 원칙적으로 신분의 차이가 없어진 현대에서 사람들은 고급예술의 존재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더군다나 20세기에 들어와서 문화예술은 다양한 사상의 영향을 받아가며 무척 난해해진 것이 사실이다. 예술의 권위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이해’되지 않고 그저 ‘학습’됐다. 누구나 아는 체하며 비판하기 쉬운 정치권력에 비해 예술의 권위 앞에서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순순히 굴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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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tv의 여성·패션 채널 ‘온스타일’을 통해 방송되고 있는 피임약 광고에서 광고모델은 “좋은 사랑을 하려면 진짜 똑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바보같이 울고 짜는 것은 딱 질색이에요. 사랑하는 여자는 진짜 깐깐해야 돼요”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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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임약이라는 특성상 일반여성이 꺼리는 tv광고에 얼굴을 내밀고 ‘공부와 사랑’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밝히고 있어 성(性)을 대하는 젊은 세대의 변화를 실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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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약회사 ‘한국오가논’의 계획대로 이 광고가 강남역과 신촌 극장가에서도 방송되며 건전한 피임문화 캠페인으로 발전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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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빈>과 tv 속 일반여성의 피임약광고가 즐거운 건 사람들이 겉으로 꺼내기 망설였던 속마음을 표현했다는 데 있다. <빈>은 고급예술 앞에 선 보통사람들의 불편한 마음을 해소해준다. 영화가 끝나도록, 심지어 전문가를 자처하는 미술관 관계자까지도 빈이 약간 조작한 포스터를 알아채지 못할 때, 사람들은 ‘일반인과 별다를 것 없는’ 전문가들과 모처럼 같은 위치에 올라서서 호쾌하게 웃을 수 있다. 영화에서 빈이 가짜작품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는 재료가 포스터라는 설정에는 진품과 모조품을 구분하기 어려운, 현대예술의 검증시스템에 대한 날 선 농담도 담겨있다. 결국 <빈>은 귀족적인 고급예술에 날리는 대중적 코미디의 펀치 한 방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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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이데올로기보다 피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교육이 더 현실적인 대책임에도 사람들은 피임을 입 밖으로 꺼내는 데는 아직도 꺼림칙해 한다. 그러는 와중에 당당하게 신분을 밝힌 일반인이 피임약 광고에 출연했다는 것은 아직도 유통기한이 지난 생각을 고수하는 기성세대에 대한 젊은 세대의 펀치 한 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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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무작정 반가워하기엔 껄끄러운 면도 있다. <빈>의 주인공 로완 앳킨슨은 우리로 치자면 배삼룡이나 심형래처럼 순전히 몸으로 웃기는 연기를 선보인다. 그런데도 영화의 선전 문구에선 로완 앳킨슨이 영국 옥스퍼드 대학 출신이며 토니 블레어 총리와 친구라는 사실이 강조된다. 이건 무슨 뜻일까. 사람들의 배꼽을 잡게끔 하는, 예술작품의 권위를 뒤엎는 코미디언이 사실은 최고의 지성인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 조롱에 또 다른 권위를 부여하는 건 아닐까. 피임약광고에서 여성이 밝히는 ‘신분’은 “서울대학교 05학번”이다. 서울대의 권위를 투영함으로써 똑똑한 여자가 말해야 피임약 광고도 너그럽게 용인될 수 있다는 것일까. 한국풍토를 잘 아는 광고모델은 로완 앳킨슨보다 한 발짝 더 나아갔다. 정작 자신은 광고를 찍으면서 피임약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됐다는 ‘고백’이다. 피임약 광고로 자신의 얼굴이 알려지더라도 이중적 시각으로 자신을 보지 말기를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존관념을 상대로 한 ‘절반의 성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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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지 기자|contsmark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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