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따져보기] 월드컵 A/S를 부탁해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ontsmark0|최근 지인들과 만나 2006년의 6월을 이야기하게 될 때면 격론을 벌이게 된다. 논점은 2002년의 6월과 2006년의 6월을 어떻게 분리하여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이다. 개인적으로 4년 전 경험했던 즐거움과 해방감을 삶의 긍정적 에너지의 발현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2006년의 6월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하고픈 바람이다.
|contsmark1|
|contsmark2|
불과 4년 만에 입장을 돌변하는 것은 왠지 줏대 없는 자기 부정 같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은 2006년 6월은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광장을 사유화한 국내 자본의 문제, fifa로 상징될 수 있는 국제 자본의 압력, 월드컵 이외의 사안(평택 문제, fta 문제 등)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방송, 과도한 민족주의의 배타적이고 폭력적인 발현 등이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운다. 상황은 달라졌다는 이야기다.
|contsmark3|
|contsmark4|
물론 맞는 말이고, 냉철한 현실 인식이다. 이중 특히 2006년의 부정성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자본이다. 이른바 월드컵에 올-인한 자본의 전횡이 지난 6월의 붉은 물결 속에 숨 쉬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자본에게 기표는 중요하지 않다.
|contsmark5|
|contsmark6|
자본의 놀라운 친화력은 순식간에 대한민국의 적화통일을 이루어냈다. 일본의 대화혼(大和魂)을 연상시키는 국적 없는 ‘투혼’이란 명령과 신사에 부적을 붙이듯 붉은 리본으로 하나 되는 대한민국이라는 호소에는 자본의 빈약한, 그러나 파괴력 높은 상상력이 담겨 있다.
|contsmark7|
|contsmark8|
방송은 더욱 비판의 도마에 올라야 한다. 월드컵으로 본전을 뽑으려는 방송사의 욕망은 노골적이었다. 온 국민이 대한민국에 환호하는 틈을 타 자본은 은근슬쩍 시청자들의 등을 친다. 온 방송사들이 같은 시간, 같은 경기를, 사람을 바꿔서 방송한다.
|contsmark9|
|contsmark10|
공영방송과 민영방송이란 경계는 무색해졌다. 낮에는 분위기 띄우기로, 밤에는 월드컵 경기로, 아침에는 월드컵 상보로 방송이 도배된다. 각 방송사는 이번 6월을 대박의 ‘꿈은 이루어지는’ 달로 작정한 듯싶다. 지난 2002년, 미처 준비하지 못해 대목을 놓친 각 방송사들은 이번에는 보다 철저하고 극단적으로 월드컵 특수를 준비하였다.
|contsmark11|
|contsmark12|
상황이 이러할진대 어찌 2002년의 경험을 2006년과 연결시킬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여전히 개인적으로 2006년에서도 희망을 발견하고 싶다. 낭만주의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2002년의 경험이란 것은 광장으로의 참여를 회복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86년의 시민 항쟁 이후로 자취를 감춘 광장 정치가 2002년에 부활되었다.
|contsmark13|
|contsmark14|
새로운 세대가 광장 정치의 주역이 되었다. 이들은 386 세대 이후 자취를 감춘 잠재적 참여 세대였다. 이후 여중생 추모 촛불시위, 탄핵 반대 시위, 김선일 추모 시위와 이라크 파병 반대 시위 등은 2002년의 경험이 없었으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2002년의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contsmark15|
|contsmark16|
2002년의 축제와 같은 광장으로의 진입이 있었기에 새로운 광장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2006년의 경험도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해야 한다. 다만 문제는 이러한 광장 참여가 자본의 전횡 속에서 변질되고 있다는 것이다. 순수했던 에너지의 발현에 자본은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자신의 새로운 이윤 추구의 수로로 구속하려 한다.
|contsmark17|
|contsmark18|
그러기에 우리는 월드컵 as가 필요하다. 월드컵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작업, 2002년과 2006년의 연속성 상에서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우리 사회의 정치/문화적 원동력으로 재위치시키는 작업 말이다. 기실 방송은 2002년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짚지 못하였다. 그들에게 2002년은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디딤판이 아니라 ‘이경규가 간다’로 계속해서 유통시킬 수 있는 검증된 돈줄이었다.
|contsmark19|
|contsmark20|
이후 이루어진 월드컵 as는 그저 시청자들의 흥분과 감동에 다시 한 번 어필하여 조금이나마 더 높은 시청률을 확보하려는 퇴행적인 것이 되었다. 예상컨대 2006년 6월의 경험 역시 이렇게 될 공산이 크다. 더욱이 좌절의 경험이 주는 비장미는 더욱 매력적이지 않는가. 이렇게 될 때 2002년의 경험은 단지 4년마다 찾아올 월드컵 특수의 기원점에 지나지 않게 된다.
|contsmark21|
|contsmark22|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4년마다 찾아올 6월의 흥분이 아니라 6월 이후 지속되는 삶의 연속성이 아니겠는가. 6월의 경험을 통해 우리 사회를 어떻게 진전시킬 것인가가 아니겠는가. 퇴행적인 월드컵 as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월드컵 as가 필요한 시점이다.
|contsmark23|
|contsmark24|
홍성일/문화연대 미디어센터 운영위원|contsmark25|
저작권자 © PD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