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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그랑프리쇼…>‘불량아빠 클럽’

|contsmark0|박 근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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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가톨릭대학교 언론광고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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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들의 몫이란 좀 크고 무겁고 단단한 것이다. 대개의 생각이 그렇다. 나의 바깥에서 나를 지키는/지켜보는 눈과 목소리, 아버지는 늘 그 자리에 서있었고, 그의 힘은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사춘기를 벗어나 하나의 인격으로 사회적 승인이 떨어지기 전까지 그는 규율이며 명령이고 법률이고 당위였다. 프로이드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경험이 이를 증명하는 듯하다.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가 자라온 과정을 반추해 보건대 대체로 그럴싸하게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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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지금도 그럴까? 세대를 달리하면서 아버지의 몫들도 조금씩 바뀌어 온 것이 아닌가? 아버지라는 이름 그리고 그것에 부과되는 여러 의미들 또한 시간 속에서 그리고 그것을 가로지르는 우리의 경험들 속에서 조금씩 달라지지는 않았을까? 확실히 그런 것 같다. 지금의 자라는 세대들에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단지 생물학적 성으로 구분되는 ‘남성’으로서의 ‘아버지’ 혹은 ‘여성’으로서의 ‘어머니’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섹슈얼리티는 생물학적이라기보다는 사회학적이며, 자연적이라기보다는 문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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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프리쇼 여러분>(kbs2)이라는 사실 좀 촌스럽게 들리는 제목의 연예오락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불량아빠클럽’을 통해 우리는 이 시대 아버지의 한 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다. 물론 이 프로그램은 현대 사회의 아버지를 입체적으로 조망하며, 새로운 사회역사적 조건 속에서 아버지의 지위가 어떻게 변화하였으며, 그러한 변화가 곧 섹슈얼리티의 문제 그리고 젠더의 문제와 어떻게 연관되는지 면밀히 검토하고 있지는 않다. 물론 그랬다면, <그랑프리쇼…>에 남아 있을 수 없었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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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 프로그램의 한 코너라는 한계를 인정하는 한에서, 이 코너는 조금 눈여겨 볼만한 부분들이 있다. 우선 이 코너의 ‘아버지’가 어떠한 힘으로 다가오느냐는 문제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무너져가는 부권에 대한 마초들의 발악 혹은 여전한 남성지배의 현실 속에서 약간의 타협에 대한 능청스런 엄살인지에 대해 아마 페미니스트들은 할 말이 많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혐의에 대해 분명한 근거가 발견되지 않는 한, 그리고 적어도 지금까지의 모습만으로 본다면, ‘불량아빠’들은 <불량주부>의 육아버전이라 볼만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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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힘은 놀라워서, 인간의 삶 구석구석에 침투해 그들의 육체와 정신을 철저히 지배한다. 그러한 자본의 지배는 곧 사람들이 스스로 그 몸과 마음을 하나의 자본으로 여기도록 만들고, 그것을 밑천 삼아 끊임없이 그 자본을 확대재생산하도록 만든다. 확실히 연예인들이란 이렇게 자본에 예속된 삶의 한 전형이며, 이들이 말하는 그들의 삶은 철저히 자본에 예속된, 아니 자본 그자체로 물화한 소외된 삶의 극단적 형태이다. 그런 탓으로 이들의 ‘아버지 노릇’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건 어쩌면 자기의 ‘제대로 된’ 아버지 노릇을 포기하는 일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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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적어도 아버지의 힘은 이러한 자본의 관통을 거스를 수 있을만한 생명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불량아빠’들은 우리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의 ‘비겁함’, ‘고지식함’, ‘폭력성’, ‘성격’을 닮지 않기 바란다. 이 ‘아버지 됨’이라는 보편적인 코드는 이 코너의 약이며 독이 될 것이다. 그것은 자본을 가로지르는 힘이 될 수도, 혹은 그것에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포섭하기 위한 미끼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직은 초반의 힘이 남아 있으니 모르겠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삶의 세세한 부분에서 그 힘을 잃지 않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장담하기 힘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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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들의 수다는 아직 크고 추상적이다. 다만 그 크고 추상적인 의미들을 우리는 구체적으로 경험할 뿐이다. 이런 탓으로 크고 추상적인 그들의 수다는 아직 힘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크고 추상적인 수다들이 중언부언이 되는 순간부터 그들의 힘이 우리 삶의 구체적인 경험 그 어디까지 우리를 깊게 끌고 들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contsmark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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