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이어 즐기는 방송 진행…나는 행복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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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년간 청취자와 애환 나눠…팝음악 대중화에 큰 기여

|contsmark0|정년퇴임한 김 기 덕 mbc 라디오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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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높은 음으로), 안녕하십니까(중간 음으로), 안녕하십니까(낮은 음으로) 두시의 데이트 김기덕 입니다.(속삭이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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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초월해, 70년대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청소년기를 지낸 사람이라면 이 목소리의 색깔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김기덕(58). 그의 이름 세 글자는 mbc 라는 그가 몸 담았던 회사 브랜드를 뛰어넘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dj를 상징한다. 34년간 mbc fm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자겸 연출자로 청취자들과 애환을 함께 나눈 그가 라디오국 국장 보직을 끝으로 19일 정년퇴임했다. 72년 9월 mbc 아나운서로 입사한지 34년만이다. 그 사이 강과 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고 그의 얼굴에도 깊은 주름이 생겼지만 목소리는 세월을 비껴갔다. 그의 목소리에선 여전히 20대 생기 넘치는 젊은이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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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pd로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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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년간 <두시의 데이트>를 진행한 그는 94년 ‘단일 프로그램 최장수 제작 진행자’로 선정돼 세계 기네스북에 올랐다. 96년엔 20년 이상 mbc 라디오를 진행한 공로로 ‘골든 마우스상’을 받았고 97년엔 kbs 라디오 ‘연예가 산책’이 만든 특별기획 <광복 후 한국문화를 빛낸 20인>의 명단에 포함되기도 했다. 2004년 방송의 날에는 방송협회가 주관하는 한국방송대상 시상식에서 라디오 부문 프로듀서상을 받았다. pd로서의 제작능력을 인정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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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저를 dj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양한 음악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대중화 시킨 pd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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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73년 첫 전파를 탄 <두시의 데이트>의 dj를 맡으면서 팝송 프로그램과 인연을 맺었다. 78년 아나운서에서 라디오 pd로 보직이 바뀐 뒤 지금까지 dj겸 pd로서 프로그램 제작 현장을 지켰다. 97년부터 매일 아침 11시에 방송되는 골든디스크를 진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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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활용한 다양한 형식의 라디오 프로그램 제작과 보급.’ 김기덕 전 국장의 방송 생활을 요약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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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와 음악이 결합한 뮤직 토크쇼, 개그·드라마·음악이 결합한 개그 드라마 등 음악과 관련된 모든 시도를 다해봤어요. 음악방송 발전의 초석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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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송의 대중화’에 기여한 그의 공로에 시비를 걸 사람은 없을 듯하다. 70년대 그는 당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한 번도 시도되지 않았던 팝에 대한 전문적인 해석을 곁들인 다양한 기획 프로그램들을 제작해 fm 방송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80년대에는 드라마를 음악과 접목시킨 새롭고 파격적인 프로그램을 개발해 청소년층 뿐아니라 중장년층까지 라디오로 끌어들였다. 90년대에는 팝 음악의 체계와 이론을 본격적으로 통계화, 문서화 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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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송-가요 접목 성공한 최초 뮤지션은 서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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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전 국장은 70년대 fm 방송이 생기면서 좋은 음질의 방송이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음악 방송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고 설명한다. 80년대 외면 받던 가요 시장에 활력을 준 이는 조용필이다. 하지만 김 전 국장은 팝송의 세례를 받고 자란 뮤지션 가운데 팝송에 가요를 접목시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최초의 가수로 서태지를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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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흑인 음악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가요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가요의 발전에 팝송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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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가 각광받던 시절이 저물고 영상시대로 넘어온 요즘, 김 전 국장은 “노래가 너무 빨리 단명한다”고 걱정스런 한마디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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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노래는 여러 번 들어도 질리지 않고 귀도 덜 피곤해요. 그런데 아무리 좋은 노래라도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들으면 금방 질리게 됩니다. 그래서 유행가의 흐름이 빨리 변하고 사라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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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최근 라디오 pd들의 위기감에 공감을 표하며 “오디오의 장점을 살리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그는 오디오의 장점으로 일하면서 들을 수 있다는 점, 상상력 동원이 가능하다는 점, 친근감, 기동성을 꼽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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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방송을 하는 그에게 가장 큰 보람은 청취자의 사연을 읽을 때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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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어머니와 함께 듣던 방송을 지금은 딸과 함께 듣고 있다는 청취자의 사연을 읽을 때면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대를 이어 듣는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기쁨이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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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그는 팝문화연구소란 단체를 만들었다. 이 연구소를 운영하며 ‘팝 음악의 보급과 질서’를 목표로 활발한 저술 활동을 벌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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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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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은 어떤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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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가 되고 싶은 마지막 라디오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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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송의 인기와 맞물려 dj 김기덕의 인기는 90년대 중반까지 인기 연예인에 맞먹었다. 그는 라디오가 배출한 스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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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아나운서로 mbc에 입사한뒤 mbc-fm 부장, mbc 라디오국 국장급 제작 위원을 역임했다. 최근까지 명지전문대 실용음악과 겸임교수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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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시의 데이트> 뿐 아니라 <7시에 희망가요>(1974) <별이 빛나는 밤에>(1977) <젊음의 찬가>(1978) 등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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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전 국장은 방송생활 틈틈이 팝송 관련 책을 썼다. <김기덕의 pop 음악칼럼>(1984, 나남출판), <팝음악의 세계>(1986, 중앙일보사), <끼에 살고 큐에 살고>(1992, 나남출판), <한국인이 좋아하는 팝송>(2003, 삼호뮤직출판), 음악에세이 <노래가 있는 풍경>(2003, 다올출판사) 등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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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미래 희망은 도사가 되는 것이다. 존경하는 인물도 예수, 크리슈나 무르티 등 깨달은 사람들이다. 젊은 시절 그가 가장 좋아한 책은 노자의 도덕경. 명상에도 관심이 많았다. “방송이 끝난 뒤 오는 허전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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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디오가 없는 것도 특이한 점이다. tv를 보는 경우 역시 드물다. 침묵 속에 자신을 맡기는 것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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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말을 아끼는 그의 에너지는 1~2시간으로 제한된 방송시간에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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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몸안에 잘 함축해서 제한된 방송 시간동안 잘 뿜어내는 것이 진정한 프로”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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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선 기자|contsmark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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