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18년 전 주말연속극을 끝내며 KBS 본관 뜰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은 개성 강한 다섯 형제인 서인석, 길용우, 김주승, 안승훈, 김승진과 큰형수 이휘향이 출연한 가족 드라마였는데 5형제와 가족들이 펼친 정감 있고 우애 깊은 스토리로 당시 시청자들의 큰 호응을 받았고 방송 사상 처음으로 홍콩에 수출되는
한류(韓流)바람에 실려 말레이시아와 베트남의 드라마PD들에게 한 달간 강의를 하고 왔다. (*행정적으로 기록한다면 말레이에 본부를 둔 ABU 산하기관 AIBD =Asia-Pacific Institute of Broadcasting Development)초청으로 아시아지역 순회강의를 하고 온 것이다.) 그 곳에서 만난 드라마PD들은 한국 방송인과 한국 드라마
영화계에 무서운 '괴물'이 나타났다. 출현 20일만에 대충 국민의 1/4을 삼켜버렸다고 한다. 영화를 이데올로기전파 수단으로 동원하던 레닌 시대에나 있을 법한 사건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옛 러시아의 그것이 동원이었고 압제였다면 이것은 자발이고 또 다분히 경사스런 일이다. 그러나 천만관객시대에 모두가 기쁜 것은 아니다. 영화감독 김기덕이 그 대표적 인물
방송 현장에서 일어난 일들을 사진과 함께 애기해볼까...하고 웹진을 통해 여러분을 만나게 된 양자영PD입니다. 처음 여러분과 만나면서 마음은 200% 설레는데 얼마나 생생하게 현장을 잘 전달할 수 있을지는 저도 기대됩니다. 다만 저의 소박한 바램은, 촬영 현장에서 찍은 한 장의 사진을 가지고 사진 속의 디테일을 통해 여러분과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느낄 수
최근 들어 방송 환경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습니다. 케이블, 위성을 비롯한 뉴미디어의 본격화로 지상파 방송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고, 외주 제작사와 거대 기획사와의 관계도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거기에다 IPTV, VOD와 같은 새로운 기술의 등장으로 방송과 통신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통신재벌과도 경쟁해야 한다고 하니, 금방이라도 지상파가 망할 것처럼
‘규율이 엄한 일사분란한 군사주의적 국가체제’ 북한에 대한 이미지는 대게 이렇게 정리될 것이다. 북한에 가기 전 내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과연 그럴까? 2004년 2월 말 평양에서 열린 [일본해의 부당성에 관한 남북토론회]에 참석했다가 남한의 역사학자들과 평양인근의 덕흥리고분을 참관했다. 덕흥리고분은 현재 중국 베이징인근인 유주지역의 지방장관이었던 ‘진’이
5년 전 중국 산뚱성의 칭다오를 찾아 갔을 때 정인화 할아버지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팔순이 넘은 한국의 기업가인데, 회사수익 중 상당부분을 종업원들의 복지를 위해 써서 현지인들의 칭송이 자자하다는 것이었다. 때마침 “화류 속의 한류”라는 제목으로 중국 속의 한국인들의 활동 모습을 취재하던 나에게는 흥미 있는 아이템이 아닐 수 없었다. 현지 한국인 경제단체
유력신문사의 회장으로 있다가 주미대사가 되어 활동하던 중 모대통령후보에게 친족재벌그룹의 불법선거자금을 전달한 게 도청당해 중도하차했던 이가 다시 그 신문사 회장이 되었다. 그가 그 수치스런 일로 미국 대사자리를 물러나 귀국하던 '05년 말, 인천공항에서는 우리 언론사에 길이 남겨야 할 사건 하나가 일어났다. 어느 정당 소속 사람들이 그이의 귀국 길목을 막아
김만식씨 진술은 보도연맹원 처형과정에 직접 참여한 헌병대 초급간부의 첫 증언으로 큰 의미“최초의 보도연맹원 처형은 한국전쟁 발발 사흘 만에 강원도 횡성에서 이뤄졌다.”“처형 명령은 무전을 통해 대통령의 특명으로 받았다” “6월 27일 경 헌병사령부를 통해 대통령 특명으로 분대장급 이상 지휘관은 명령에 불복하는 부대원을 사형시키고 남로당 계열 및 보도연맹 관
돌아보는 방송 80년, 지난 10년의 궤적 올해는 방송 80년을 맞는 해다. 1927년 당시 경성방송국에서 최초의 방송(라디오)을 했던 것에서 기산(起算)한 것이다. 물론 일제 강점기의 방송이라 정체성에 관한 시비가 없지 않지만 미디어사의 측면에서 1920년대에 방송을 시작했던 의미는 상당하다. 학계에서도 ‘근대방송 80년 한국방송 60년’과 같은 식으로
최근 일제강점기에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들이 축재한 재산에 대해 국가귀속결정이 내려졌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내린 결정이다. 이번에 해당되는 재산은 이들 후손이 보유한 토지 총 25만 4906㎡(추정시가 63억원)이다. 예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러일전쟁 이후 1904년에서 1910년까지 한반도 주권을 일본에 내주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설마 설마 했는데 버지니아공대 32명 학살 사건의 범인이 한국인 1.5세 동포 학생으로 드러났다. 참으로 난감하고 당황스런 심정은 한국인이면 대부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하인즈 워드에 열광하고 박찬호 선수의 활약상에 긍부를 가졌던 것과 꼭 같이 이 사건에 반응하였다. 그것이 ‘일반화의 오류’든 ‘나이브한 민족주의’든 많은 한국인들이 사고하
'봄의 불청객' 황사가 한국에 몰려왔다. 공교롭게 주말을 끼고 기습을 해 봄맞이 나들이를 준비하던 사람들의 당황과 불만이 컸다. 나는 요즘 일요일이면 한강변 둔치에 조성된 길을 따라 20여 킬로미터씩 5시간 남짓 걷는 도보운동을 즐기는데 황사통에 포기하고 말았다. 황사전용 마스크가 나왔다지만 어쩐지 미심쩍다. 게다가 수 시간을 그렇게 하고 걸어 다닐 엄두가
연초부터 라는 책이 큰 이슈가 되고 있다. 는 재미일본인이 쓴 영문소설로 ‘2차 대전 당시 북한 나남 지역에 살던 일본인 모녀 3인이 종전 직전에 일본으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한다’는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한 내용이다. 한국인들이 일본여자들을 강간한다는 내용이 담긴 이 책이 미국에서 교과서로 채택되어 있는 것
올해는 6월항쟁 20주년의 해다. 우리 사회가 독재와 폭력의 억압에서 벗어난 87년 체제 이후 이미 적지 않은 세월이 흘렀다. 그 동안 우리는 민주주의와 인간다운 사회를 위하여 노력해 왔다. 그러나 냉정히 응시하면 지체와 혼선이 더 많다. 올해가 IMF 외환위기 10주년의 해임을 환기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겸손해야 할 일이다. 외환위기가 1997년 12월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