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보 전 위원과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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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성유보 전 상임 방송위원은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뒤 1968년 동아일보 기자가 됐다. 1974년 10?4 자유언론실천선언에 참여하기 전까지 그는 비교적 예측이 가능한 안전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언론자유를 외친 대가로 회사에서 해고된 그 순간부터 그의 생활은 안락함과 점점 거리가 멀어졌다. 제1대 민주언론운동협의회 사무국장,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사회평론 대표이사,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이사장, 국가보안법폐지 국민연대 공동대표 등의 이력이 말해주듯 그의 삶의 궤적은 민주화 운동과 맞물려 있다.


그는 “87년 6월 항쟁은 오만한 정권이 만들어낸 필연적 사건”이라고 정리한다.
“86년 5월 인천 사태이후 재야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인사들이 구속되거나 수배됐다. 당시 이창복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이 나를 찾아와 곧 자신이 구속된다며 후임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 나는 돈을 버는 재주도 없고 일할 동료도 없어 받아들일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나 ‘간판만 지켜 달라’는 간청에 못 이겨 제안을 받아들였다.”


성 전위원은 “당시는 일을 하려 해도 지인들이 모두 수감돼 있어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전했다. 그해 10월 건국대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으로 1400여명의 학생 운동가들이 구속됐다. 성 전위원은 이 사건에 항의하며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로인해 그는 남영동으로 끌려갔다.


“남영동에서 만난 조사관들은 모두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은 ‘노동운동가, 학생운동가들을 일망타진 했으니 재야운동은 이제 끝났다’며 ‘민주화 운동을 접으라’고 빈정거렸다. 그 오만함이 박종철씨를 무리하게 고문해 사망으로 이르게 했으며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성 전위원은 방송위원 재직시절 ‘합리적인 조정자’로 불리며 동료와 선후배들 사이에서 신망을 얻었다. 칭찬을 들은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났다.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려고 노력했을 뿐”이라는 머쓱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와의 인터뷰는 12일 오후 경기도 일산 자택에서 2시간 정도 진행됐다. 스무평 남짓한 아담한 아파트에서 그가 살아온 삶의 자취가 느껴졌다. 청빈함과 검소함이 집안 곳곳에서 묻어났다.  

 

임현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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