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자유 지킨 강용주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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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그는 굴곡과 파란의 삶을 살아오면서도,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해 애썼던 사람이다. 요즘같은 시대에 이런 삶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시대에 대한 풍자도 될 것이다.내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지난 해 8월 무렵이었다. 어떤 사람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그의 이야기가 나왔다. 그 자리에서 나누었던 다른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들 중 하나였다.

그는 무슨 사건에 연루되어 간첩죄로 오랜 기간 동안 복역 중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상전향제’폐지를 위해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싸워왔다고 했다. 그런데 내 머리 속에 박혀들었던 것은, ‘사상전향제’가 폐지되어 많은 양심수들이 출소했는데도, 그는 여전히 교도소에 갇혀 있다는 이야기였다. 전향제 대신 도입된 준법서약서를 안 썼기 때문이라고 했다. 왜 안 썼을까?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는 교도소에 ‘갇혀’ 있는 게 아니라, ‘남아’ 있는 것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던 것 같다. 턱없이 자존심만 내세우는 고집쟁이, 어쩐지 탐구욕을 부추기는 기인. 그는 그렇게 내 기억 속에 비집고 들어왔다.

그의 이름은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다시 확인한 것은 몇 달 지나서였다. 강용주, 38세, 구미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14년 복역. 지난 2월 25일 특사로 풀려나는 그를 나는 취재차 만났다. 3월 4일, 프로그램을 마치고 나서,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를 다시 만났다.14년만에 돌아온 세상에 대한 소감을 물으니 장난스럽게 여자들이 다 예뻐 보인다고 했다. 교도소에 들어갈 때는 나이도 함께 영치한다던가, 나는 그날 서른 여덟 살이면서, 스물 네 살인 강용주를 맞이했다.

그는 사람을 편하게 대하고 유머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오래 전에 알았던 사람처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그날 그에 대한 나의 선입견을 교정해야 했다. 그는 마음 한번 먹으면 아무런 동요없이 밀어부치는 무시무시한 사람이 아니라, 흔들리고 고통스러워 한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시절, 광주 민주화 운동의 와중에 오로지 광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총을 잡았다. 그러나 도청이 진압된 날 아침, 그는 총 한번 못 쏴보고 ‘비겁하게’ 도망을 쳤다. 그 후로 그의 뇌리에는 두 가지의 풍경이 각인되었다. 하나는 광주에서 자행된 살육이고, 또 하나는 그곳에서 비겁하게 도망치는 자신의 뒷모습이었다. 살아남았다는 자책감…. 그때 다짐한 것이 다시는 도망치지 말고 배신하지 말자는 것이었다고 한다.

‘광주’를 겪은 그가 전남대 의대에 입학한 후, 학생운동에 투신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이 터졌고, 그는 느닷없이 간첩으로 ‘만들어졌다’(그의 말이고, 어머니의 말이고, 그를 아는 많은 사람들의 얘기다. 검찰은 다르게 이야기한다). 1심에서 무기 징역, 2심에서는 20년 징역. 대전교도소에서 3, 40년의 수형생활 끝에 노인이 되어버린 장기수들을 보면서, 그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너희들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아주 분명한 위협으로 느껴졌다. 몇 십년 후에 그 자신도 저렇게 될 거라는 생각은 아주 공포스러워 그는 밤마다 울었다고 했다.그도 두어번은 전향서를 써버리고 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같은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랑했던 여자’가 전향할 거라는 소문을 들었다.“나는 어떻게 할까…. 내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어요. 그 사람이 와서 ‘사랑아, 너도 같이 가자’,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할까…. 그러면 나도 가야지…. 가지 않을 도리가 있겠어요. 본래 사랑이 그런 거잖아요.”그러나 사랑은 오지 않았다. 그래, 너는 가라, 나는 남겠다.강용주는 자신이 원래부터 인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처음에는 단지 운동 차원에서, 전술적으로 인권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다음, 문득 뒤돌아보니 자신에게 ‘사상과 양심의 자유’의 문제는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 있었다. 그 10년의 세월은 다른 의미로, 어떤 이유로도 ‘사상과 양심의 자유’는 제한되거나 침해될 수 없다는 생각이 내면화되고, 그 장애물과 싸우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는 인권의 기본은 ‘내가 싫은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학생 시절에 프락치는 때려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10년이 지나고 나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는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차라리 죽음을 택한 많은 ‘양심의 순교자’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어떤 이유로도 사람의 내심(內心)을 표출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 어떻게 사람의 내심을 재판하겠다는 말인가? 그게 가능하기나 한가?’ 작년에 준법서약서를 쓰라고 했을 때 그는 거부했다.

준법서약서 역시 내심의 표출을 강요하는 억압적인 제도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같은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난 6개월 후에야 그는 풀려났다. 이번에도 준법서약서를 쓰지 않고 ‘당당하게’ 나왔다. “사람이 넘어지는 것은 큰 산에 걸려서가 아니라 작은 돌뿌리에 걸려서지요. 나는 광주에서 이미 도망을 쳤고, 다시는 배신하지 말자고 했지만, 또 몇 번의 배신을 했지요. 나는 그저 그 광주를 잊지 않으려고 애쓰고, 또 다시는 배신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내가 모자란 인간이기 때문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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