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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FM가정음악 계절 음반 기획한 김혜선 PD
입사 3년반만에 ‘첫 연출’한 MBC 김새별 PD
첫 시집 ‘옛날 녹천으로 갔다’ 낸 BBS 장대송 PD
만난다-독일 유학 떠나는 시사평론가 정범구 박사

|contsmark0|“클래식과 친해지는 계기 됐으면” kbs fm가정음악 계절 음반 기획한 김혜선 pd
|contsmark1|계절을 앞서가는 사람이라면 흔히 패션디자이너나 잡지사 기자를 떠올리지만 kbs 1fm 김혜선 pd는 작년 봄부터 계절을 앞서 살았다. 사계(四季)를 주제로 클래식 음반을 기획했기 때문. 그래서 나온 결실이 fm 가정음악 ‘가을’ ‘겨울’에 이어, 새 봄의 시작과 함께 선보인 fm 가정음악 ‘봄’이다. “평소 클래식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 기존 편집음반에 대한 아쉬움이 많았거든요. 언젠가 꼭 한번 편집음반 작업을 해봐야지 했는데 기회가 됐어요.”아침과 저녁의 느낌이 다르고, 하루하루의 느낌도 다르지만 첫 음반이어서 보편적인 정서를 껴안을 수 있는 계절을 택했다고.“프로그램 큐시트처럼 곡 연결에 신경을 많이 썼어요. 연결은 참 중요해요. 곡 하나하나가 좋아도 연결이 시원치 않으면 딱 떨어지지 않거든요.”‘봄’을 떠올릴 수 있는 수많은 곡 중에 실릴 수 있는 곡은 열곡 남짓. 때문에 곡을 ‘버리는’ 작업이 너무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방송의 1회성을 넘어 기록으로 남는다는 것이 마음 한편 참 뿌듯했다는 김혜선 pd. 그가 이번 음반을 만들면서 잡았던 모토는 ‘클래식은 내친구’였단다.“매니아들을 위한 음반이 아닌 초보자를 위한 음반이거든요. 클래식을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쉽게 친해질 수 있도록 너무 자극적이거나 공부하듯 들어야 하는 곡은 피했어요. 보편적이지만 ‘이 곡 제목이 뭐였지?’할 정도의 새로운 곡들과 청취자들이 선호했던 신청곡 중심으로 얼개를 짰어요.”김혜선 pd는 음반제작사와 협의해 한국에 수입되지 않은 곡도 수록하는 성의를 보였다.입사후 14년 동안 줄곧 클래식 음악 프로그램을 해오면서 더욱 클래식을 좋아하게 됐다는 김 pd가 생각하는 클래식과 친해지는 법은 ‘작은 것’부터 시작하기. 좋아하는 소품부터 조금씩 조금씩 듣다보면 어느새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게 된다는 것이다. 흔히 클래식 음반은 3천장, 수입음반의 경우 1천장이면 괜찮은 정도라고들 한다는데 김혜선 pd가 기획한 fm 가정음악 ‘가을’은 4만장이나 판매됐단다. ‘흥행’에 너무 성공해 작업이 더욱 부담스럽고 조심스러웠다는 김혜선 pd.프로그램으로, 음반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클래식과 친구되기”를 바라는 그의 기획의도는 성공한 것 같다. fm 가정음악 ‘봄’을 들으며, 클래식에 문외한인 기자 역시도 조금씩 클래식이 좋아지고 있으니.“이제 ‘여름’ 음반 작업을 하고 있어요. 지난번 ‘봄’ 작업할 땐 그렇게도 여름에 맞는 곡이 많더니 왜 이렇게 안들리죠?”김혜선 pd의 ‘여름’은 벌써 시작됐다.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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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5|고된 프로그램도 거뜬 “엄살부릴 정도는 아니예요”입사 3년반만에 ‘첫 연출’한 mbc 김새별 pd
|contsmark6|pd하면 떠오르는 모습, 밤샘…담배 혹은 술…피곤에 절은 얼굴. 만약 그 떠올림의 대상이 여성pd라면 추가되는 한가지, ‘여성’같지 않은 터프함. 하지만 특정 집단에 대한 이런 식의 단순화는 집단내 개인을 설명하는 데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다. 김새별 pd 역시 외부인의 섣부른 단정에 경종을 울리는 한 예라 할 수 있다(솔직히 이름과의 어색한 대비를 기대(?)했었다). 김새별 pd는 지난 3월 24일의 인사발령을 통해 입사 3년 반만에 소위 ‘지긋지긋한’ 조연출 딱지를 떼고 <화제집중 생방송 6시> 첫연출로 본격 pd가 됐다. 이제 슬슬 pd테가 날만한 연차. 고단하기로 이름난 생방송 정보 프로그램을 연출하는 김 pd에게 그 어려움을 묻자 대뜸 날아오는 대답, “엄살부릴 정도는 아니예요.” 아직 신참 pd인 만큼 남다른 활력이야 예상했던 바, 그러나 김 pd의 한마디 한마디에는 독특한 맛이 있다. 바로 과장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다. “가끔 ‘나인투식스(9 to 6)’ 직장에서 우아하게(?) 살고 싶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힘들게 일하고 난 뒤의 자유를 느끼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죠.”김새별 pd는 허락되는 자유시간의 상당부분을 여행에 쏟아 붓는다고 한다. 밤새워 방송을 끝내고 바로 출발한 적도 있다는 김 pd가 다녀온 나라만도 벌써 14개국. 시간이 없어 ‘있던 애인과도 곧잘 헤어지게 되는’ 처지가 조연출이라는데 일과 별개로 행해지는 이러한 여행이 어떻게 가능한걸까? 그녀의 대답은 “저질러본 사람이 저지른다”는 것이었다. 불현듯 생기는 자투리 시간에 서슴없이 짐을 챙기는 추진력을 가진 자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얘기다.요즘 김 pd는 일본어를 배우는 데 푹 빠져 있다. 여행 중에 얻은 일본인, 일본문화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언젠가 근사한 ‘일본’에 관한 프로그램을 만들고도 싶단다. 빡빡하고 고단한 일정, 자칫 발등에 떨어지는 프로그램에 매몰돼 ‘나’를 잃기 쉬운 요즘 현업 분위기를 고려한다면 김 pd의 ‘저지레’는 사뭇 신선하다.pd가 된 것이 가장 후회스러울 때가 언제냐는 질문에 “졸릴 때”라고 대답하는 김 pd. 그러나 첫연출 이후의 변화를 묻자 금세 진지한 얼굴로 “나를 떠나 이제 꾸려가야할 팀이 생겼다는 점, 그리고 그 팀에 대해 느껴지는 책임감”을 드는 그에게서 섣불리 신참 pd의 모습을 떠올리려는 발상은 금물이다. “주위 동료들은 제가 여자라 스탭들이 유독 제게 잘해준다고들 해요.” 일부러 “씩씩한 척, 터프한 척”하지 않는다는 김 pd. 그러나 그의 자연스러움이 오히려 그 누구보다 씩씩하고 터프하게 느껴진다.<남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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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9|“프로그램이건 시(詩)건 몸이 실려야죠” 첫 시집 ‘옛날 녹천으로 갔다’ 낸 bbs 장대송 pd
|contsmark10|pd로서의 일상이 매우 고달프다는 걸 감안한다면 무엇을 겸하는 것은 어렵다. 더군다나 ‘정신을 쏟아야 하는’ 것으로 알려진 시작(詩作)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bbs 장대송 pd. ‘옛날 녹천으로 갔다’(창작과비평사)라는 첫 시집을 냈다. 9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니 이미 pd이기 이전에 시인이었던 셈이다.왜 만 8년만에야 ‘첫’ 시집을 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웃으며 ‘게을러서’라고 대답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재촉하자 나온 그의 대답.“본격적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한 3년쯤 됐어요. 청탁을 다 거절하고 있었거든요. 왜? 몸이 실리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오래도록 고민하고 정신을 닦는 것, 자기 시각을 넓히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 장대송 pd의 지론이다. 곰삭을수록 좋은 것은 비단 젓갈만이 아닌 모양이다.글 쓰는 이들의 꿈은 ‘전업 작가’라는데 그 역시 전업 시인 장대송을 꿈꾸고 있을까?“전혀 없어요. 전업 작가라면 자기 관리 능력이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글로 먹고 살려면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쓸 수도 있어요.”그는 현재 매일프로그램, 주간프로그램 합쳐 5개의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도대체 언제 시를 쓰냐는 질문은 우문이었다. 화장실에 가다가도, 프로그램을 만들다가도 동료들과 술을 먹다가도 ‘pd취재수첩’에 ‘긁적긁적’ 한다고, 아주 ‘쉽게’ 대답했다.그러나 그의 시는 적어도 기자에게는 어려웠다. 한 평론가는 장 pd의 시를 두고 ‘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고 평했다.“사실은 쉬운데, 어렵게 봐서 그런 거요. 시인이 어떤 정신을 가지고 시를 썼는지 독자는 알 필요가 없거든요. 전혀 다른 방향일지라도 자신의 감정으로 그냥 읽고 느끼면 돼요.”그의 ‘시쓰기’는 구체적인 사물이 아닌 ‘허상’을 통해 실상을 보는 것이라고 짤막하게 부연했다. 상금이 탐나서 생전 처음 쓴 시가 신춘문예에 당선됐다는 장대송 pd. 하지만 결코 ‘쉽게’ 시를 쓰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이든 ‘마음고생을 오래 하면 좋다’는 그의 말은 프로그램에 이르러선 아쉬움이 된다.“프로그램도 좋은 거 하고 싶은데… 여건이 안돼요. 매일매일 풀빵 찍어내듯 해야 하니까. 겨우 기본에서 처지지 않는 수준이죠.”그래서 그는 나중에 자비를 들여서라도 무속이 어떻게 발생했고 변화해왔는지 종교는 어떻게 발생했는지 등을 살펴보는 무속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고 한다.그의 시에 ‘몸을 싣듯’, 프로그램에도 ‘기꺼이 몸을 실을 수 있는’ 그 때는 언제쯤일까. <이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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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13|“방송, 세상을 향해 열린 대화의 창”독일 유학 떠나는 시사평론가 정범구 박사
|contsmark14|정범구 박사가 4월 말, 6개월 예정으로 독일을 방문한다.독일 유학을 결정함에 따라 이제 cbs <시사쟈키, 오늘과 내일>과 kbs <정범구의 세상읽기>에서 그가 진행하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비록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그의 프로그램을 들어오고 보아오던 시청자들은 그의 빈자리를 아쉬워하고 있다. 시청률이 낮은 것을 이유로 폐지위기에 처해있던 <세상읽기>를 살려낸 것도 시청자들이 아니던가. <세상읽기>를 보기 위해 컴퓨터에 tv수신카드를 설치했다는 한 네티즌은 정 박사를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볼 수 있게 하는 눈을 키워준 미디어 속의 스승’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인기 없고 소위 ‘장사 안 되는’ 시사프로를 진행하는 사람 중에서 누가 이런 말을 들었을까. 그 스스로 말하듯이 ‘무당’으로서의 ‘신명’이 시청자들에게 전해졌기 때문일까.그가 말하는 ‘무당’이란 인터뷰어로서 가져야 할 매개자의 역할. 그가 시사평론가로서 활동하는 무대는 사람을 만나는 곳이었다. <시사쟈키>가 그렇고 <세상읽기>가 그렇고 시사월간지 ‘말’의 ‘정범구가 만난 사람’이 그렇다.“인터뷰어로서 ‘만나는 사람의 면모를 얼마나 종합적으로 이해하고 제대로 전달하는가’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흔히 받는 질문 중에 하나가 ‘만났던 사람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사람이 누구냐’는 것인데,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의미 있고 소중하지요.”인터뷰 내내 우리 사회가 기층과의 대화가 부족하고 사회 전반의 커뮤니케이션이 막혀있는 현실을 지적했던 그는 방송을 ‘의사소통의 장’으로 정의한다.“방송은 기층과의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늘 진지하게 사회의 의제설정을 고민해야 합니다. 방송이 민주적 문화를 발전시키는 장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정치학 박사이고 시사평론가인 그가 많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 방송을 ‘정치교육·훈련의 장’으로 보고 활동 공간으로 ‘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때문에 이번 독일행에서도 그는 ‘방송저널리즘’에 대해 공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번 독일방문은 ‘재충전’의 의미도 크다. 자신이 ‘바닥난 것’을 이미 시청자들도 알고 있을 거라는 그. 사람들을 만나고 사회와 대화하려고 했던 그가 이제 조금 더 큰 곳으로 세상을 만나러 간다. 그가 떠나는 이번 여정이 그 스스로에게는 물론 우리에게도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이대연>|contsmark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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