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길화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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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화 칼럼
대통령과 돈
  • 승인 1999.05.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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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kbs의 어린이날 특집 프로그램 <날아라 하늘 높이, 대통령과 꿈나무>에서 서울시내 초등학교 고학년 1천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가 눈길을 끈다. 우리 어린이들에게 대통령을 부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물었더니 1위가 “돈이 많을 것 같아서”(23%)라고 답했다는 것이다. 재미있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다. 돈에 민감한 요즘 아이들의 세태와 imf가 동심에 미친 영향을 더듬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어린이의 세계에는 기성세대의 가치관과 행동이 투영돼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설문조사 결과는 또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설문 결과로 읽을 수 있는 첫 번째 의미는 배금주의(拜金主義)다. 그런데 이는 새삼스런 것이 아니다. 돈이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물신주의의 신화는 이미 우리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가 된지 오래다. 그보다도 어린이들이 대통령이라는 자리를 돈에 대한 숭배를 실현할 수 있는 것으로 연결시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대통령이면 무엇이든 좋은 것은 다 가질 수 있다’고 보는 대통령만능주의다. 철없는 동심이 아무 생각없이 한 말을 두고 지나친 의미부여가 아니냐고 지적하실 분도 있겠다. 하지만 그게 그렇지 않다. 무릇 어린이들의 가치체계에는 어른들이 영향을 주게 마련이다. 어린이들은 기성세대를 동일시하면서 어른들의 가치를 내면화한다. 어린이에게 장래의 희망을 물었을 때를 예로 들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오래도록 부동의 1위를 차지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대통령이다. 간혹 운동선수나 대중 스타가 그 자리에 들어설 때도 있었지만 대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아예 육사를 나와 장군이 된 후에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하는 어린이까지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가부장 이데올로기, 출세주의 등을 기저(基底)에 둔 이 대통령지상주의는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구체적인 특정 대통령들의 면면이 없었다면 그토록 증폭되고 확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 노 두 전대통령의 쓰다 남긴 비자금이 몇 백 억인가 하는 얘기가 아직도 귀에 쟁쟁하고, 당장 김대중 대통령부터 야당총재 시절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20억인가 얼마인가를 받았다는 사실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어린이들이라고 이같은 일을 귀동냥으로라도 모를 리가 없고 보면 대통령과 돈을 연결시킨 것은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라고 할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만 하더라도 지난 대선의 tv 토론에서 경쟁 후보로부터 예의 20억에 관해 집요한 공격을 받을 때 “대통령이면 그 정도 돈은 있을 줄 알았다. 노대통령의 기밀비라고 생각했다”는 답을 했었던 일이 떠오르는데 이만하면 우리 어린이들의 통찰력은 거의 대통령감(?)이다. 어린이들은 또 이번 설문에서 “언제 대통령이 되고 싶으냐”는 질문에 가장 많은 어린이가 “돈이 없어서 사고 싶은 것을 못살 때”(14%)라고 답했다고 한다. 결국 서울시내 초등학교 고학년생들이 파악한 대로라면 ‘돈이 많고, 그 돈을 마음껏 쓸 수 있는’ 자리가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아무리 철모르는 초등학생이라고는 하지만 너무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런 정도의 정치의식을 가진 이들이 우리 현실 정치권 주변에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대통령은 돈이 많고, 돈을 마음대로 쓰는 자리’라고 정녕 믿는 것인지 권력 주변을 얼쩡거리면서 정치권을 기웃거리는 정치 철새나 부나비떼가 허다하다. 이들이 정치를 지망하면서 보이는 행태는 거의 설문조사에 나타난 초등학생 수준이다. 우리 현실에서 정치는 갈등을 조정하고 대안을 창출하는 ‘가능성의 기예(技藝)’를 포기한 채 그저 정치과잉의 기류속에서 정치만능주의와 정치패권주의만을 조장하고 있다. 보스 중심의 권위적 붕당(朋黨) 구조하에서, 밑으로부터의 민주적 절차를 통하지 않은 정치 신인을 ‘간택’하고 ‘점지’하겠다는 ‘젊은 피’ 논의에도 이는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밀실거래와 폐쇄적 논의과정 속에서 이루어진 최근의 고모 변호사 해프닝은 우리 정치의 수준이 왜 초등학생의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지를 거칠게나마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초등학생을 모독했다고 항의해오지 않을까 걱정된다). 그건 그렇고 도대체 한국의 대통령들이 돈을 얼마나 많이 갖고 쓰는 것인지는 정말 궁금하기 짝이 없다. <본보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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