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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서 있는 이유
박유경-KBS TV2국

|contsmark0|71년생. 여자. 95년 인류학과 졸업. 그해 10월에 4직급 5호봉 교양 pd로 kbs 입사. 현재 5년차. <국악한마당> 조연출.
|contsmark1|tv를 보면서 나를 감동시키는 것은 한 줄의 스크롤이다. “rh-o형 혈액 급구… 연락바랍니다…” 이 한 줄의 스크롤로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그만큼 전파의 위력은 대단하고, 신성하다. 공중파는 누군가가 그 권력을 독점해서는 안되는 국민 모두의 것이다. 이것이 내가 여기에서 20대 후반을 보내고, 30대 역시 여기서 시작하고 싶어하는 이유이다.
|contsmark2|때로는 선배들이 밉다. pd는 무엇으로 살며, 우리의 비전은 무엇인지 속시원한 해답을 제시하는 선배를 본 적이 거의 없다. 월급쟁이로 그날그날 살아가는 권태로운 일상의 다른 회사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pd는 자존심으로 사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감동, 정보를 전달하고, 불의와 부조리를 파헤치는, 프로그램으로 사람과 사람을 묶어줄 수 있다는 자존심.하지만, 많은 pd들은 너무나 쉽게 굴복한다. 자신의 프로그램에 대해 부당한 간섭을 받아도, 그 결과로 프로그램이 문을 닫게 되어도 침묵하고 받아들인다. 사회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비난해야 할 pd가 정작 자신이 당하는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해서는 침묵한다.합격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까지 kbs에 대해 자부심과 함께 무한한 감사와 애정을 가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어떤 회사가 인류학-도대체 거기서 뭘 가르치지?-을 전공한 여자를 이만한 연봉으로 고용해 주겠는가! 밤샘작업, 휴일작업도 물론 많지만 여태까지 내가 하는 일은 테잎 복사, 간단한 야외 촬영, 진행비 영수증 붙이기, 출장비 타기, 정산 등이다. 유수 명문대를 졸업하고 대기업의 대리나 과장쯤 달고 있을 나이의 남자 선배와 후배들이 하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단순반복작업이므로 일당 2만원의 아이 하나 두면 적어도 세 프로그램의 조연출들은 프로그램 제작과 홍보에 더 힘쓸 수 있을 텐데, 항상 선배들과 부장님은 “내가 너희만 할 때…”를 운운한다. 물론 그 말을 허풍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단지 90년대의 합리성으로 판단하면 이런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기는 우리들 일당이 너무 많다는 말이다. 우리 ad들은 프로그램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서류가 밀리고 출연료가 지급이 안되면 혼나지만, 프로그램에 대한 창의적인 고민은 pd와 작가의 몫이다. 뭔가 해보려고 하지만 출연료 정산과 진행비 정산, 녹화 준비를 하다보면 벌써 한주일이 훌쩍 간다. 지금은 하고 싶은 것도 많고, 아이디어도 많지만 이렇게 몇 년 더 보내고 나면 무미건조한 일상과 서류더미 속에서 작가가 써주는 대로 찍고, 위에서 붙이라는 대로 붙이고, 빼라는 대로 빼는 fd보다 못한 pd가 될 것 같다.pd사회의 공동체 의식과 자부심이 없어지고 선후배간의 유대가 끊겨 개개인이 파편화되고, 방송에 대한 애정과 주인의식을 잃는다면 굳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조직에 매몰되어 그날그날 살아가는 삶은 우리가 선택한 삶이 아니었다.
|contsmark3|그러나 나는 아직도 화면 하단에 흐르는 한 줄의 스크롤에 눈물을 흘린다. 어쩌면 그 스크롤이 바로 내가 여기 있는 이유를 다시금 새롭게 가르쳐 주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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