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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은 신문과 싸워 이길 수 있다”

|contsmark0|월간 인물과 사상 9월호에 문화연구가 조흡 씨가 쓴 ‘방송은 신문과 싸워 이길 수 있다’가 실려 주목을 끌었다.신문의 일방적인 방송비평은 있어도, 방송의 신문비평이 전무한 상황에서, 매체 상호간의 비평이 매체간의 발전을 가져올 수 있다는 명제는 그 의미조차 무색한 형편이다.방송은 언제까지 신문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가.조흡 씨는 결코 그렇지 않다고 판단하며,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글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판단돼 인물과사상사와 필자인 조흡 씨의 동의를 얻어 요약·정리해 싣는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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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6|지식인은 텔레비전을 멀리한다?텔레비전은 말 그대로 만인이 사용하는 미디어지만 한국의 지식인치고 텔레비전을 욕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다. 텔레비전이 왜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일까? 이는 텔레비전이 오락 중심으로 편성된, 시청자들의 눈을 자극하는 매체이지만 신문은 독자들의 머리를 자극하는 ‘심층분석’을 위주로 짜여있다는 상식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의 차이가 방송을 신문보다 덜 ‘지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고, 따라서 지식인들이 신문을 방송보다 선호하는 것이다.두 매체간에 존재하는 추상적 이미지 차이가 본질적 차이로 이어지는 파급효과는 실로 엄청나다. 방송은 항상 신문의 권위에 눌려 사회적 아젠다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다. 방송이 정치·사회적 안건에 대해 신문의 재판(再版)이다 보니 방송에 사회적 힘이 실릴 리 없고, 지식인들도 방송 출연보다는 신문에 칼럼 쓰는 것을 더 명예로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contsmark7|길들여진 방송한국의 방송이 너무 흐리터분해진 1차적인 책임은 한국의 독재정권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해방 이후 한국의 헌정사가 최근 몇 년의 과도기를 제외하고는 독재정치로 점철됐다는 사실은 방송이 신문에 종속적 위치에 놓이게 된 가장 큰 이유다.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한국 방송은 항상 독재정권의 대변자였고, 오로지 각하의 영생을 위해 존재할 뿐이었다.그나마 독재정권에 맞서 이리 꼬고 저리 꼬아 기사를 작성했던 몇몇 신문기자들 덕택에 당시 국민들은 세상 돌아가는 일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방송은 신문의 권위에 눌려 저절로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방송은 너무나 오랫동안 ‘알아서 기는’ 자기검열을 하다보니 이제는 그것이 하나의 프로페셔널 이데올로기로 정착된 감마저 있다. 게다가 정권은 여전히 방송을 정부 홍보의 도구로 생각하고 제도를 통해 방송을 합법적으로 이용하려 하고 있다. 방송과 신문, 권력, 그리고 시청자로 복잡하게 얽혀있는 문제는 각각의 이익이 서로 대치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방송은 30년동안의 관행에서 벗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위험 부담을 회피하고 자신의 이익을 우선 생각하는 이익집단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신문은 지난 30년 동안 누려왔던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에서 방송보다 우월한 위치를 그대로 굳히고 싶어하며, 정부는 방송을 여전히 정권의 선전도구로 이용하려 들고, 시청자들은 독재정권 하에서의 방송과 비교해서 아무 것도 달라진 게 없어 가슴 답답함을 느끼고 있다.
|contsmark8|방송이 신문과 경쟁해야 모두에게 이롭다사정이 이런데도 방송은 여전히 제도타령이다. 그러나 방송의 민주화는 제도의 문제만이 아니다. 현재의 제도로도 얼마든지 지금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내용으로 시민들이 공감하는 방송을 만들 수 있다. 한국방송이 처해 있는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던 것이 지난 3주 동안의 방송노조 파업이 아니었을까? 시민과 신문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한 방송파업. 이런 시민과 신문으로부터의 무관심을 방송은 극복해야 한다.그렇다면 방송과 신문, 정권과 시민 모두 승자가 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신문과 방송이 상호 경쟁하는 것이다. 경쟁은 정권을 더욱더 민주적으로 만들어 주며 시민들이 신문과 방송에 보다 더 열렬한 지지를 보내게 하는 파급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그러나 한국에서 민주화가 확대되기 위해서는 먼저 방송이 신문을 힘으로 이겨야 한다. 현재 정치·사회적 영향력이 일방적으로 기울어진 상황에서 방송의 힘을 기르는 일이 무엇보다 시급하다. 방송은 먼저 신문을 제대로 비판해야 한다. 방송은 오락 프로그램만으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해나갈 수 없다. 방송은 부분적 사실을 전체의 진실로, 신문사의 이익을 국가의 이익으로 가장한 몇몇 신문의 실체를 알리는데 주력해야 한다. 신문의 여론조작을 여론조작이라고 밝히고, 굳이 그것이 신문사의 논조며 색깔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대안이 될 수 있는 논조를 방송이 제시해야 한다. 방송은 신문기사를 확인하는 작업만으로도 최고의 시청률을 확보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적잖은 신문기사가 코미디보다 훨씬 더 웃기기 때문이다.
|contsmark9|통제가 아니라 혼돈이 새로운 통치원리다정부도 방송과 신문을 경쟁시키는 것이 곧 자신을 돕는 길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권력이 방송을 독점해 정권의 홍보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은 지극히 비효율적인 방법임을 인식해야 한다.모든 언론사로 하여금 서로 경쟁케 하는 것이 권력을 위해 보다 효율적인 통치방법이 될 수 있다. 언론의 자유를 무한대로 허용하고 철저한 시장경제 원칙에 의해 언론사도 자유경쟁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한다. 지금 정부가 해야할 일은 다양한 시장에서 다양한 언론상품이 생산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일이다.그러나 이런 시도를 신문사에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한국의 신문들은 자신의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모든 지역의 모든 독자들에게 영업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저하게 탈정치화된 모습으로 위장해 정치를 희화화하면서 오로지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언론시장의 경쟁과 상호비판은 공영방송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경쟁이 가능하다.그렇다면 시중에 떠도는 다양한 보도가 정권에 무슨 도움이 될까? 만약 주어진 사건에 대해 여러 의견이 생산되는 시스템이었다면 밍크코트 사건이, 환경부 장관의 촌지 보도가, 특검제 논의가 어떻게 전개됐을까? 독자들은 무척 혼란스러웠을 것이고, 바로 이 점이 정권에서 기대할 수 있는 이익이다. 그렇다면 같은 얘기를 여러 신문과 방송이 동시에 생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정권의 입장에서는 최선의 언론정책이 아닐까? 독자들이 혼란스러울 정도로 다양한 견해가 시중에 유통됐다면 그들은 더 이상 누구 얘기가 옳은지 몰랐을 것 아니냐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통치방법이다. ‘혼돈’은 21세기의 통치원리다. 정부가 이를 고민하는 동안 방송 또한 해야할 일이 있다. 방송 민주화는 제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방송인들이 스스로 싸워 쟁취하는 것이라는 점을 이미 90년대 초 경험으로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제는 제도개선 투쟁과 더불어 방송 내부의 민주화를 스스로 이룩해야 한다. 그래야만 방송이 일류 언론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도대체 방송은 언제까지 신문의 ‘2중대’ 취급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contsmark10|방송이 신문을 이길 수 있는 방법한국에서 신문이 방송을 압도하는 이유는 방송이 대중을 움직이고 있지만 신문은 소수의 파워 엘리트들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방송이 힘을 키우려면 분산돼 있는 대중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아야 한다. 즉 방송이 대중의 대변인이 되는 것이다. 신문의 속보이는 자사 이기주의에서 비롯된 대중 껴안기가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의 이익을 보살펴주는 관심과 이해가 필요하다.그러자면 방송이 연예·오락 프로그램에만 전념해서는 안되며, 방송의 영향력을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으로 키워나가야 한다. 우선 정치와 경제 부문에서는 현재 편성하고 있는 주말 시사대담 프로그램을 대폭 확대할 필요가 있다. 시민들의 일상생활과 이익에 직결되는 문제를 최고 책임자를 불러 따져 물어야 한다. 그 책임자가 답변한 내용은 뉴스시간마다 확대 보도해 나중에 뒤집지 않도록 못을 박아 둬야 하고, 만약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경우 그를 다시 불러 따져 묻는 ‘쇼’도 필요하다.또 하나, 거의 모든 신문이 주택정보, 주식정보, 사이버 정보 등을 섹션으로 다루고 있는데 이 주제야말로 방송이 신문을 압도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닐까? 방송은 영상을 결합해 보다 구체적이고 입체적으로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주부들을 연속극에서 해방시키고 청소년들을 오락 프로그램에서 탈출시킬 수 있는 소재는 얼마든지 있다. 만약 방송이 전시효과를 노려 이와 유사한 프로그램을 맛보기 식으로 제작해 변두리 시간대에 방영한다면 아직도 대중들이 진정으로 무엇을 바라는지 모르는 소치이며, 따라서 방송의 신문 종속 현상은 지속될 것이다.또 소설가, 학자, 전문가들의 저서를 심층분석·소개하는 시간을 마련해 그들을 방송의 영향권안에 머물도록 하고, 지식인들을 흡수해야 한다. 일주일에 딱 한시간만 투자하면 가능한 일이다.물론 이런 프로그램들은 많은 사람들이 재밌게 즐길 수 있도록 포장해 프라임타임대에 방영해 연예 프로그램과 경쟁할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만들어야 한다. 이제는 방송이 연속극과 오락 프로그램 이외의 장르로도 높은 시청률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이렇게 방송에서 이제까지 소홀했던 분야에 관심을 보이게 되면 방송의 영향력은 자연히 신문 못지 않게 확대될 것이다.바로 그 영향력을 무기 삼아 방송은 개혁의 선두가 돼야 한다. 신문과는 다른 목소리로 시민의 이익을 철저히 대변하는 미디움으로 재도약해야 한다.돈 많고 지워 높은 사람들은 텔레비전 대신 파티와 고급 스포츠를 즐기면서 살아간다. 방송이 굳이 귀하신 몸들의 이익을 대변할 필요가 있겠는가? 방송이 아니더라도 신문이 이들의 이익을 과잉 보호해 주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시민을 대표하는 방송이 신문에게 선전포고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방송이 그렇게 한다면 싸움 없이도 신문을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contsmark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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