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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사회에서 깨달은 역설의 희망박정근 MBC 교양제작국

|contsmark0|거기에 가본 사람은 안다. 그곳이 얼마나 묘한 곳인지를. 이른바 분단 1번지 판문점. 선 하나 그어놓고 이쪽에서 저쪽을, 저쪽에서 이쪽을 울안의 짐승 보듯 구경하는 곳! 하지만 그 선이 어떤 선인가. 그 선을 긋기 위해 수백만명의 목숨이 제물처럼 바쳐진, 피로 그어진 선이 아닌가. 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었다.임수경 방북사건의 취재는 사실 올 6월 초 방영된 의 한 꼭지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스페셜’한지를 깨닫는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의 반응은 의외였다.“임수경? 뭐 새로운 게 있겠어!” 갸우뚱?… 이거 나만 그런가, 그때 내가 이곳에 없어서인가?(정확히 10년전 1989년 8월 임수경은 판문점을 통과하기 위해 죽음의 문턱을 넘고 있었고, 그 때 나는 부산에서 일본 큐슈까지 카약을 타고 한·일 3해협을 횡단하기 위해 역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래서 임수경의 모든 것들이 나에게만 이처럼 신선한 감동과 충격으로 와닿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10년이란 세월이 결코 짧은 건 아니었다. 벌써 임수경은 과거시제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사람들이 임수경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과연 그런가? 알고 있다면 무엇을, 어떤 시점으로 알고 있다는 것인가?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잊혀진 사건 - 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방송이 나갔다. 피드백이 뒤를 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사실을 알게되어 고맙다고 말했다. 반면 형평성 운운하며 출연자와 제작진을 빨갱이라고 매도하는 원색적인 비난도 귀를 울렸다. 하지만 그 모든 반응들을 - 그것이 찬사이건 비난이건 - 모두 정중하게 받아들이고 똑같이 대해 주었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우리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식민지, 해방, 전쟁, 기아, 분단 그리고 이 좁은 한반도에 몰아친 외세와 극단적인 이념의 충돌은 극과 극의 피해자를 양산하였다. 이른바 빨갱이로 몰려서 그리고 그 빨갱이로 인하여 서로 죽이고 죽였던 가족사의 생존자들이 지금도 그 현장을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생생한 방법으로 분단을 경험하였다. 80년 봄 나는 철책선에 있었다. 산봉우리 초소에 서면 임진강이 북에서 남으로 휴전선을 가르며 흐르고, 장엄한 황혼이 지면 남북의 철책선을 따라 경계등이 두줄기 은빛 벨트처럼 한반도의 허리를 두르는 곳, 그곳에서 나는 육군 보병 소총수로 복무 중이었다.그러던 중 영어를 조금 한다는 이유로 미군 레이다 기지의 통역겸 레이다병으로 차출되어 근무하고 있었고, 그때 ‘광주’가 있었다. 어느 순간 철책선엔 밤낮 완전무장으로 전원 비상근무(일명 a형 근무)가 이어지는 가운데 태평성대를 노래하는 대한민국 tv와 철저하게 검열 받은 언론, 검열 받지 않은 미군측 tv와 신문, 잡지 그리고 미군들이 심심풀이로 돌려보는 북한 tv에서 말 그대로 적나라하게 펼쳐지는 광주의 모습…. 이 모두를 한눈에 즉시할 수 있는 곳, 나는 그곳에 있었다. 그 날 이후로 밤이면 초병이 철수한 대공 초소에 홀로 올라 별빛아래 분노와 고통, 통한의 눈물이 흐르는 오랜 침묵의 시간이 이어졌다. 결국 이 모든 비극의 근원은 분단이었다. 남북의 상호적대적 의존관계, 안보에 기생하는 일부 기득권층, 동시에 지금껏 유지하고 키워온 우리의 모든 것을 날릴 수 있는 상존하는 군사적 충돌의 위험성, 외세의 휘둘림과 의존성, 보이지 않는 가운데 우리의 의식까지를 짓누르는 그 무엇, 끝없는 민족적 에너지의 소모전- 이 모든 것의 원인은 결국 분단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이대로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인가? 민족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우리가 가야할 지향점은 어디인가?은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이었다. 물론 당사자들은 그들이 딛고 있던 시대의 현실과 바라보는 시선의 지향점 사이에 놓여진 괴리만큼이나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그건 분명 민족의 하나됨을 향한 발걸음이었고 분단의 벽을 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결국 내가 알고자 싶었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한 개인으로서의 ‘임수경’이 아니라 한 시대로서의 ‘임수경’이었다. 그리고 감정적 분단주의자들에게 그들의 행위는 감상적 통일주의자의 해프닝으로 여겨졌겠지만 10년전 온몸으로 넘었던 분단의 가시밭길이 이제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제법 그 폭이 넓어졌다. 소떼도 넘고 축구단도 넘었다. 그 길이 넓어져 남북한 모두가 자유스럽게 넘나들게 되면 그게 바로 통일 아닌가? 그런 점에서 임수경과 문규현 신부의 판문점을 통한 귀환은 민간 교류의 날과 정부간 협력의 씨로 짜여진 다양한 대화 인프라 구축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 글을 마치면서 임수경씨의 인터뷰 한 장면이 떠오른다. 그건 자신에게 사소한 도움을 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아니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인연을 맺었다는 이유 때문에 감옥에 가고(그렇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 때문에 신원 조회에 걸려 번듯한 직업하나 못가지고 오늘까지 험하게 살아왔을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미안함의 표시. 그 표정을 잊을 수 없다. 이들에게 대신 이런 말로 고마움을 표하면 실례가 될까? 분단사회에서 깨달은 역설의 희망- 그것은 모순과 갈등 구조를 바로잡기 위한 투쟁과 좌절, 보다 성숙하고 열린사회를 위한 진통과 고통 속에서 성장해온 남쪽사회의 역동성에서 다음 세기를 향한 통일과 희망의 싹을 볼 수 있다는 것을.그리고 정작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잘 모른다.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곳인지를, 20세기의 마지막 문(closing door)이자 21세기를 여는 출입구(opening gate)로서의 한반도의 역사성을, 지구상의 어려움은 모두 모아 놓은 듯한 모순과 허위와 갈등이 혼재된 난제- 한반도의 해법은 21세기의 패러다임이 될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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