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기 - KBC <부용산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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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기 - KBC <부용산을 아십니까?>
‘부용산’에 배어있는 시대의 아픔김영문 광주방송(KBC) 보도제작국
  • 승인 1999.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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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smark0|남도인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던 구전가요 ‘부용산’이 올해 봄 세상밖으로 드러나면서 이 노래에 대한 관심들이 커졌다. 그동안 ‘부용산’이라는 곡은 목포에서 만들어졌느니, 보성 벌교에서 만들어졌느니를 두고 두 지역간에 원산지(?)를 둘러싼 미묘한 갈등까지 빚어졌다. 그런가하면 이 노래의 탄생설에 대해서도 여러가지 얘기가 나돌았다. 이 노래의 작사가가 수필가였던 소청 조희관 선생이니, 소설가 박화성 선생이니, 시인이셨던 박기동 선생이니 하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부용산을 아십니까?>의 제작은 확실히 규명되지 않은 노래의 실체와 벌교와 목포 두 지역의 미묘한 경쟁관계까지 방영할 생각으로 시작됐다.이 노래의 작곡자가 한국전쟁 당시에 월북했고 월북 작곡자라는 이유 때문에 불려지는 것이 금지됐다는 사실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우리의 아픈 상처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소재라고 느꼈다. 취재가 시작되면서 의문은 한가지씩 벗겨졌다. 목포 항도여중 2회 졸업생인 송수 씨와 항도여중 초대 조희관 교장선생의 유가족들을 순천에서 찾아냈고 작사가인 박기동 시인이 고국을 등지고 호주 시드니에서 연금으로 생활하고 있다는 믿기지 않는 사실을 밝혀냈다. 빨치산 ‘남부군’ 소속이었던 이균동 노인은 본인이 산속에서 그 노래를 작곡했다는 사람을 만났고 그에게서 노래를 배웠다고 비교적 정확하게 노래를 불러줬다. 취재가 어느정도 마무리될 무렵인 6월 7일 벌교를 행해 달리던 취재차량이 빗길에 전복되면서 탑승자 4명이 교통사고를 입었다. 필자는 그 이후 40일을 입원해야했다.“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한줄기 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흡사 ‘가고파’를 연상시키는 서정적인 노랫말의 한 대목처럼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가버릴뻔 했던 사선을 넘기면서 프로그램은 제작됐다.취재를 통해 ‘부용산’은 시인이었던 박기동이 1947년 노랫말을 썼고 1948년 목포 항도여중에서 음악교사로 근무하던 안성현 선생이 곡을 붙인 것으로 드러났다.시는 벌교에서 곡은 목포에서 붙여진 것이었다. 1948년 10월 목포 항도여중 예술제에서 1회 졸업생인 배금순이 최초로 불러 그야말로 목포시민들의 심금을 울리면서 빠르게 퍼져나간 것이다. 마침 여순사건이 터지고 벌교와 보성사람들이 빨치산이란 이름으로 산속에 숨고 그들사이에서 이 노래는 고향을 그리는 노래로, 한마디 말없이 쓰러져가는 동료들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불리워졌다. 이 노래 발표이후 작곡가 안성현은 1949년 9월 학교에서 의원면직 되고 그 이후의 행방은 묘연하다. 다만 그가 사라지기 전까지 발표됐던 그의 작품들은 아직까지 목포사람들에게 구전되고 있고 김소월 시에 작자 미상으로 전해지던 ‘엄마야 누나야’가 그의 작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당시 작업에서는 사상이나 이념이 전혀 없는 순수음악인으로서의 모습을 느낄 수가 있다. 그런가하면 작사가인 박기동은 이유없이 좌경시인으로 찍혀(?) 해외로 떠나야하는 아픔을 겪었다. 그는 캐나다를 거쳐 지금은 호주에서 12평짜리 난민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언제 완성될지도 모를 작품집 발간에 힘쓰고 있다.좌경시인에 월북작곡가의 작품으로 ‘부용산’ 노래는 자연스럽게 금기시된 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50여 년이 흐른 후 노래는 해금됐다. 취재에 들어간지 3개월만인 9월 5일 지역사 제작 프로그램으로서는 드물게 일요일 저녁 7시에 방송이 되면서 시청자들의 반향은 컸다. 노래 한곡의 의미보다는 아직도 채 씻기지 않은 시대의 아픔을 느끼는 많은 이들의 공감의 소리였다.방송직후 그동안 아무에게도 드러내 보이지 않았던 작곡가 안성현 선생의 가족에게서 연락이 왔고 그의 부인이 생존해 광주에 살고 있으며 아직도 그때의 아픔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또한 벌교지역 초등학교 교사들을 중심으로 ‘원로교사 박기동 선배님 고국 정착 청원 서명운동’이 펼쳐지고 있다. 이런 사연들을 중심으로 후속 프로그램 제작에 들어갔다.노래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도 중요하지만 그것은 과정일뿐 사람들에 의해 불리워 짐으로써 완성된다. 그러고 보면 ‘부용산’은 이미 51년 전에 완성된 작품이며 남도인의 한의 정서에 녹아흐르면서 전해져 온 것이다.최근에 작사가인 박기동 시인은 이 노래의 2절을 만들어 보내왔다.“그리움 강이되어 내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contsmar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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