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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와 탈(脫)근대 사이에서-해방을 위한 변명

|contsmark0|두려움과 유혹의 야누스“웬 대하? 큰 새우를 말하는 거야? 큰 강을 말하는 거야?” 대하(大河)다큐멘터리라는 다소 위압적(?)인 타이틀을 두고 일선 pd들의 반응은 냉소에 가까웠다. 20세기의 마지막 문턱. 지난 100년의 역사를 성찰적으로 정리해본다는 기획의 의의는 인정하지만 프로그램으로서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우리의 제작여건과 풍토속에서 과연 어느 정도나 가능할까? 이미 예정된 실패를 확인하는데 그치거나 bbc <민중의 세기>를 어설프게 흉내내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까? 시청자들의 기호는 트렌드로만 치닫는데 아예 처음부터 시청자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지는 않을까?하지만 나름대로의 끌림도 적지 않았다. 그나마 시청률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kbs니까 가능한 기획이 아닐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겠나. 우려와 유혹을 동시에 느끼며 우리는 숙제(?)를 시작했다.(1999년 3월)
|contsmark1|짓눌림의 나날들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신진소장학자들을 중심으로 자문팀을 꾸리는 것. 한국역사연구회의 젊은 학자들을 통해 제작진은 최근까지의 연구성과와 문제의식들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프로그램과 학문의 세계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자문팀과의 회동은 3차 회의 이후 중단되었다. 이후 pd와 작가들만의 고독한 공부와 회의가 이어졌다. 결론을 내지 못하는 토론, 난해한 책과의 전투, 그것은 역사라는 이름의 수렁이었다.한달 후, 우리가 합의할 수 있었던 것은 이 프로그램의 성격이 반성적, 성찰적이어야 한다는 것. 따라서 10개의 주제가 다소 무겁더라도 진지해야 한다는 것. ‘해방’은 낙관주의적 색채가 짙으니 단순히 제목에 그치고 실제 핵심 컨셉은 ‘미완(未完)의 해방’이어야 한다는 것 정도였다. 나머지는 여전히 안개 속이었다. 우선 10편을 구분하는 기준조차 세우기 어려웠다. 20세기의 전반 50년간 식민지적 군대를 경험하고, 신식민지(?)라는 주변부적 보편성과 분단·고속성장이라는 특이성을 갖춘 한국의 근대. 한번도 ‘혁명’을 경험하지 못한 채 봉건적 요소, 근대 자본주의적 요소, 탈근대적 요소가 기괴하게 뒤엉켜 있는 소위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어떻게 10개로 갈라낼 것인가? 소재와 구성방식도 도무지 풀리지 않았다. 기존의 편년체적 서술을 답습하지 않아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만 과연 어디서 돌파구를 구할 것인가? 특정한 포인트나 시뮬라크르, 인물을 설정해서 구체성을 확보하는 것이 구성의 요체이련만, 과연 100년이라는 시간을 커버할 만한 대표성과 함량을 지닌 소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새로운 시각을 일관성 있게 담보해낼 수 있을 것인가?
|contsmark2|6인 6색, 각개약진마침내 방송개시 두달 전, 어쩔수 없이 10개의 주제영역(땅-봉건, 교육열의 허실-무지, 식민지적 근대와 친일-식민, 민주화투쟁속의 민중-독재, 분단이 낳은 일상의 억압과 질곡-전쟁, 이데올로기, 여인 삼대를 통해본 성차별-여성, 경제성장과 상대적 빈곤의 현재성-빈곤, 노동과 일상의주체성 회복-시간, 자율적 민족사의 모색-반도)이 설정됐다. 형식은 정통다큐멘터리. 시청률보다는 사실의 엄격성과 문제의식의 진지함을 앞세우기로 했다.하지만 취재과정 역시 벽이 높았다. 무엇보다 사료의 빈곤. 당연히 있으리라 믿었던 자료가 없음을 확인하고 황당함과 허탈감속에 발길을 돌리기 일쑤였다. 정부기록보존소나 독립기념관엔 익히 알려진 88년(?) 자료가 대부분이고 증언을 해줄만한 이들은 대부분이 사망한 경우가 많았다. 구성안 속에 그려졌던 호랑이는 어느새 고양이를 닮아가고 있었다.(1999년 6월∼7월)
|contsmark3|시간의 사슬, 예고된 실패(?)전통적 시각의 안이함을 넘어서려던 제작진의 시도는 특히 편집·구성의 단계에서 시련을 맞게 된다. 기존의 우익 근대주의(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담론을 넘어서는 그 순간부터 한걸음 한걸음이 지뢰밭이었다. 비주류의 담론들은 진정성은 있되 그 자체의 편향성에서 또한 자유롭지 않았고 팩트로 뒷받침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새로이 대두하는 탈근대주의 담론은 이제 막 우리 현실과 접목을 시도해보는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그렇다면 과연 어떤 담론의 틀을 사용해 일관성있는 구성을 담보할 것인가? 어느 지점에 주파수를 맞추어야 현실에 적합하고 유의미한 메시지에 이르게 되는가? 감각은 탈근대화되었지만, 너무도 근대성이 부족한 구조와 관행에 사로잡혀 사는 이땅의 모두에게. 방송일자가 코앞에 닥쳐온 그 순간까지 제작진들은 방황했다. 좀 더 방황할 시간이 있었더라면….
|contsmark4|<해방>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그러한 거대담론이 먹히냐’에서부터 제목만 보고 쓴 듯한 모 언론비평지의 인상비평, 오랜만에 진지하고 엄정한 프로그램이었다는 관련학계 일부의 칭찬까지.필자는 개인적으로 실패라는 평가에 동의할 수 있다. 평균 시청률이 6%여서가 아니라 ‘반성적 성찰’이라는 기획의도에 철저하지 않았으므로…. 다만 나름대로의 한가닥 자부심을 고백한다. 진정 진지했었노라고.그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진지함의 시간이 지난 지금 필자는 아직도 근대성과 탈근대 사이에서 불가피한 세기말의 혼란을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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