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욱희의 내시경] 늦깍이 미국 유학생이 보내 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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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욱희의 내시경] 늦깍이 미국 유학생이 보내 온 편지
  • PD저널
  • 승인 2007.03.12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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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대학 82학번, 이른바 386세대입니다.
 PD로서 세상에 자랑할 만한 아니 세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 프로그램을 아직까지 제대로 만들지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나이는 40대 중반에 접어들었고, 흰 머리카락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 대학 동기 중에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나이 마흔에 뒤 늦게 미국 유학을 간 친구가 있습니다. 얼마 전 취재차 미국 갔을 때 대학 졸업 후 근 20여년 만에 그 친구를 만났습니다.
 

 제국의 중심 미국 그리고 그 중에서도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뉴욕에서 고민도 많았고 다들 나름의 방식으로 치열할 수밖에 없었던 대학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를 만난 사실은 제법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못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각자 살아온 삶을, 그 속 깊은 이야기는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서 편집하고 방송하느라 또 바쁜 일상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오늘은 나이 마흔에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그 친구가 얼마 전 보내온 글을 소개해 드릴까 합니다.  잠시 시간 되시면 그냥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번역은 반역이다>의 저자 박상익 선생은 변방의 패배적 지식인으로 중심권 문화에 동화되지 못해 안달하는 군상들을 일컬어 ‘기지촌 근성’이라고 부른다.
 
 최근 한국에서 또 한 명이 우리 학교 내가 다니는 과에 ‘비지팅 스칼라’로 들어왔는데 첫 만남 자리에서부터 대뜸 대놓고 하는 말이 “전 학문에는 뜻이 없어요. 여긴 공부하러 온 게 아니라...”였어.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 오신 비지팅 학부모였던 셈인데...


 이렇게 와서 그냥 애들 영어교육만 고이 시키고 가면 그나마 다행이겠는데 이런 사람일수록 입에 침이 마르게 미국을 찬미하는 숭미주의자가 되어 돌아가서는 무슨 신문이나 잡지마다 버젓이 자신의 미국생활 경험을 밑천삼아 무슨 시론이니 평론이니 쓰고는 한다.


 이곳 학교에 입학했을 때 조교인 내게 우리 학과장이 한국에서 온 비지팅 교수와 뭔가 일을 도모해 보라고 해서 마침 좋은 기회다, 신이 났었는데 그 교수는 배가 불러 인사하는 임산부 조교인 내가 “안쓰럽다”며 “그 몸으로 어떻게 공부를 해요?” 하고는 나의 전언과 제안에도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그 교수는 일 년 내내 골프장에서 살다가 글 한줄 안 쓰고 돌아갔다. 요즘도 가끔 그 교수는 미국 교육시스템의 선진성에 대해서 글을 쓰시곤 한다. 글을 읽는 마음이 여간 착찹한 게 아니다. 근데 이런 일이 한둘이 아니다.


 공부하기 싫으면 안식년에 그냥 안식이나 하다 가시면 좀 좋으냐. 그래도 레주메에 그럴듯한 이력 한줄 더 남기고 싶어서 굳이 무슨 학교 무슨 과 초빙교수로 들어오려고 안달하는 모습이라니...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면서 영어 좀 하는 게 무슨 벼슬이라고 막상 와서는 그 영어, 골프장에서나 쓰다 가시고... 휴우~!


 말이 난 김에 말인데 특파원이라고 오는 기자나 피디들 중에도 짜증나는 경우가 수두룩이다. 특파원들의 리포트를 곰곰이 살펴보면 대개가 ‘오렌지 카운티’ 발이거나 ‘페어펙스 카운티’ 혹은 ‘버겐 카운티’ 발이다.


 그게 어딘고 하니 엘에이, 워싱턴 디씨, 뉴저지에 한국 특파원, 상사원들이 모여 사는 학군 좋고 비교적 부촌인 동네들이다. 거기서 나오는 소식이 미국 전체를 떠들썩하게 하는 대단한 정보라도 되는 양 우리나라 유명 탤런트의 딸이 그 동네 무슨 커뮤니티 센터가 주관하는 미술대회에서 입상했다는 것도 미국에서 조국을 빛낸 거사로 한국에 소개된다.


 지금 미국에서 히스패닉 고용원들과 한국인 업주들 사이의 불합리한 노동관행이 앞으로 어떤 후과를 가져올지, 엘에이 폭동이 재현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우려는 그들 귀에 와 닿지 않는 모양이다.


 엊그제 나온 한 미주 한국 신문의 기사제목은 “어디 (히스페닉계) 종업원들 무서워 장사 해먹겠나? 걸핏하면 탈세, 노동법 위반 고발 협박” 이었다. 체불임금에 항의하며 피켓팅을 하는 사진 속의 히스패닉 해고자들은 졸지에 ‘협박범’으로 둔갑해 버렸다. 
(중략)


 아, 이제 더 이상 기지촌 근성의 주류들 말고 청신한 기백과 창창한 눈빛으로 빛나는 젊음을 보고 싶다. 아직은 그 소망이 살아있고 그 소망을 충족해주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숨 쉬고 산다.  

 늙지들 마라. 머리카락보다 뇌가 더 빨리 늙지는 마라.

 

 

 조욱희 / <SBS스페셜> PD


 91년 SBS 편성팀 편성PD 입사해 <생방송 행복찾기>,  <생방송 모닝와이드>,  <사람만이 희망이다>,  <토요일은 즐거워>, <그것이 알고 싶다> 등을 연출해 왔다. 조 PD는 지난해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 사형제 폐지와 관련한 프로그램을 제작해 제9회 엠네스티 언론상을 수상했다. 현재 <SBS스페셜>을 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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