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수의 방송 맛 보기] '단박인터뷰'와 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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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의 발견〉을 시작한 지 3년 반이 되는 올 3월 중순 선배 피디의 전화를 받았다. 저녁을 함께 하자는 것. 개편 관련이야기를 하다가 슬슬 본론을 꺼냈다. 새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수시키는 데 해볼 의향이 있냐는 것이다. 새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던 차에 ‘이 프로그램은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쳤다. 게다가 선배에게 진 빚도 갚아야 한다는 의무감도 작용했다. 흡사 첩보영화의 주인공이 옛 보스의 지령을 받는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이 순간은 채권자와 채무자가 바뀌는 순간이기도 하다.

프로그램 주인을 찾느라 고민했던 선배는 헤어지며 “오늘밤부터는 편히 잘 수 있겠다”며 유유히 사라졌다. 선배와 헤어진 그날부터 불면의 밤이 시작되었다. 프로그램 기획안을 쓰고, 콘셉트를 잡고 방향을 잡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 생전 처음 해보는 시사인터뷰가 낯설고 감이 잡히지를 않았다. 게다가 진행자는 피디다. 사전을 뒤져 ‘단박’이라는 단어를 찾았다. ‘즉시’, ‘ 직접적으로’, ‘현장에서’를 뜻하는 부사를 붙여 〈단박인터뷰〉라고 이름 지었다.

화․수․목 3일 방송되는 준 일일방송의 편성도 생경하기는 마찬가지다. 방송일이 다가올수록 불안감은 커졌다. 방송 일주일 전까지도 출연자가 결정되지 않았다. 불안해하는 스태프들을 “프로그램이 스스로 섭외를 하니, 프로그램에 귀를 기울이자”는 말도 안 되는 말로 위로했다.

▲왼쪽부터 '단박인터뷰'의 홍경수 PD, 진행을 맡은 김영선 PD, 그리고 '단박인터뷰'가 만난 '피겨 요정' 김연아 선수


방송 며칠 앞두고 섭외가 결정되고 첫 방송을 하게 되었다. 프로그램의 질은 아쉽지만, 문제없이 방송을 치러냈다는 것 자체가 절반의 성공이라고 생각할 만큼 힘든 프로그램이었다. 게다가 없는 집에 제삿날 돌아오듯이 닥치는 방송을 위해 쉴 새 없이 뛰느라 제대로 된 뒤풀이도 못하고 한 달이 지났다.

팀워크가 걱정되어 방송이 시작되고 한 달이 지날 즈음 엠티를 떠났다. 목적지는 전남 목포와 진도. 운림산방을 보고 영암 구림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여정을 잡았다. 좁은 봉고차에 몸을 세워 탄 우리들은 아침 일찍 서해안고속도로를 탔다. 그동안 쌓인 피로 때문인지 모두 쿨쿨 잠을 잤다. 목포 독천식당에는 오후 2시가 다되어 도착했다. 다들 힘들어 지쳐 있다가, 갈낙탕과 특 낙지비빔밥으로 생기를 얻었다. 고생한 보람을 느끼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제 어디로 가요?” 식사를 마친 후배들이 여유 있게 물었다.
“진도 운림산방”

차는 한 시간여 남하했다. 첨찰산 아랫자락에 고요히 자리한 운림산방의 지세나 풍광은 사람의 마음에 돌을 달아 바다 깊숙이 잡아 내리는 서늘함이 있다. 이 고요와 품격을 만들고 지키느라 소치 허련의 자손들이 얼마나 노심초사했을지 가늠할 수 있다. 사는 곳 자체가 그림인 이곳에서 좋은 그림이 안 나오기도 어렵다 싶다. 영화 〈스캔들〉에서 전도연이 배를 탔던 연못이 있는 정원이 이곳이다.

운림산방을 마음껏 누린 스태프들에게 저녁식사를 물었다. “전복죽 아니면 홍어” 전복죽이어서 약하다 생각했는지 홍어를 먹자는 의견이 나왔다. 4명의 피디들은 홍어를 먹을 줄 알지만 나머지는 전혀 먹지 못한다. 이런 경우를 위해 홍어와 게장을 함께 내는 식당이 있다. 목포 하당신도심의 인동주마을. 진도에서 차를 타고 다시 목포로 나와 인동주마을에 들렀다. 4인 한상에 홍어 삼합과 게장 두 마리가 나오고 밥과 국이 나온다. 값은 3만원. 홍어를 먹는 피디들은 함께 모여 삼합을 먹고, 스태프들은 게장을 먹었다. 남은 홍어는 포장하도록 비닐봉투를 배치해 놓았다.

영암 구림마을 숙소로 가는 도중에 라면을 샀다. 홍어라면을 끓여 먹기 위해서다.

인터넷카페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에서 제안한 요리가 바로 홍어라면이다. 수박을 먹으며 프로그램 토론을 하느라, 홍어라면은 결국 먹지 못했다. 아침을 먹고 다산초당을 보고 귀경길에 올랐다. 아침도 든든히 먹어서 점심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라면을 먹었다. 어제 먹다 남은 홍어를 남겨놓고 온 것을 생각하니 아쉽기만 했다. 그래도 〈단박인터뷰〉 엠티의 기억은 값싸고 푸짐하게 먹었던 홍어에 있다.

▲'단박인터뷰'는 5월 1일 첫 방송 이후 7월 25일 현재까지 37명의 화제의 인물들을 만났다. 사진 왼쪽 위부터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 조순형 민주당 의원, 피아니스트 임동혁, 소설가 김훈을 인터뷰하고 있는 장면.


그 후 홍어라면을 맛있게 먹은 것은 강원도 평창의 펜션에서였다. 봉평의 맛있다는 식당에서 맛본 메밀국수의 맛에 실망하고, 다음번에는 라면과 홍어를 준비해 갔다. 하룻밤을 자고 출발하기 직전에 점심으로 홍어라면을 끓였다. 요령은 쉽다. 라면을 끓이다가 삭은 홍어 2-3점을 넣어 함께 끓이면 되는 것이다. 홍어가 익으면 휘산성이 더욱 강해져서 라면의 느끼한 맛을 단박에 없애준다. 강원도 산골에서 이내를 바라보며 먹는 홍어라면의 맛은 잊을 수 없다.

또 한 번은 친구가 부친상을 당해 조문을 갔다. 진도가 고향인 친구네는 문상객을 위해 홍어를 준비했다. 잘 알다시피 전라도에서는 홍어가 안 나오면 잔치의 격이 크게 떨어진다고 본다. 홍어 삼합을 먹다가 옆에 컵라면이 있어서 컵라면에 홍어 2-3점을 넣고 익기를 기다려 먹었다. 처음 맛본 친구들은 홍어라면의 시원한맛에 혀를 내둘렀다. 요즘도 입맛 없을 때는 홍어라면이 생각나고, 회사 앞 라면집에서 홍어라면 메뉴를 추가하면 어떨까? 대박일까? 라는 상상을 하곤 한다.

〈단박인터뷰〉가 시작되고 세 달째를 맞았다. 계속 섭외하고 녹화하고 편집하고 뚝딱뚝딱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바쁨의 소용돌이에서 우리가 진도까지 엠티를 갔는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단박인터뷰처럼 콩 볶아 먹는 듯 바쁜 프로그램에서 가장 기억나는 음식이 발효음식인 홍어라는 것도 의아하다.

들이대는 프로임에도 불구하고, 홍어처럼 숙성된 깊은 맛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단박인터뷰〉의 기획의도다. 물론 생각만큼 잘 되지 않는다. 소설가 김훈의 말처럼 ‘작품은 단박에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는 비에 옷 젖고,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주 3회 규칙적으로 프로그램에 혼을 담다 보면 홍어처럼 쏴하고 시원한 깊은 맛이 우러날지 모른다. 홍어가 아니라면 홍어라면의 맛에라도 닮고 싶은 허망한 믿음을 가지고 〈단박인터뷰〉는 나아가고 있다.  끝. 

홍경수 KBS 〈단박인터뷰〉 PD


현재 〈단박인터뷰〉를 연출하고 있으며,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을 좋아한다. PD지망생들을 위한 < PD, WHO & HOW >를 대표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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