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진의 타블라 라싸] 괴물 김기덕 감독 편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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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계에 무서운 '괴물'이 나타났다. 출현 20일만에 대충 국민의 1/4을 삼켜버렸다고 한다.

영화를 이데올로기전파 수단으로 동원하던 레닌 시대에나 있을 법한 사건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옛 러시아의 그것이 동원이었고 압제였다면 이것은 자발이고 또 다분히 경사스런 일이다.
 
그러나 천만관객시대에 모두가 기쁜 것은 아니다. 영화감독 김기덕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관객 1천만시대라고 좋아들  하지만 전 슬픕니다." "이제 한국 영화제에는 작품을 출품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자신의 작품시사회에서 했다는 말은 자기영화에 대한 옹호를 넘어 방자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사실 김기덕감독이야 말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국 영화계의 '괴물'이다.

그는 가장 적은 돈으로, 가장 단기간에, 가장 많은 영화를 만들어 내고 있는 감독이다. <악어>를 필두로 데뷔 11년만에 13편의 영화를 자신이 직접 쓰고 직접 만든다는 것은 한 인간의 광기 어린 예술혼과 천재성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며, 괴물스런 감독만이 해낼 수 있는 세계적 유례를 찾기 힘든 업적이다.

내 눈에 비친 김 감독은 가히 '천재적' 괴물이다. 그를 공식석상에서 '천재적'이라 칭한 건 4년전, 청룡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해 그가 만든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란 작품을 본 뒤였다.
 
그 영화 속에는 보통사람들의 상식과 상상을 뛰어넘는 비범한 아이디어와 예술적 상상력이 총서 되어있었다. 그래서 작품상을 투표하는 자리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영화와 이 천재적 감독에게 줄 수 있는 모든 표를 주겠습니다."

얼마 후<사마리아>가 개봉되자 만사를 제쳐놓고 극장으로 달려갔다. 돌출발언이 옳았는지 확인하기 위한 줄달음이었다. 다행히 <사마리아>에도, <빈집>에도 그의 천재적 비범함이 가득 차 있었다.
 
그 후 그는 두 작품으로 베를린과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물론 국제적 대상들이 그의 천재성을 검정해주는 필요충분조건이라 우기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보노라면 영화사에 찬연히 빛나는 천재감독들과 비견할만한 파격적 창조와 예술적 반동이 발견된다. 보통 감독들이 표출해 내지 못하는 독창적인 작가정신과 매혹적 정신세계가 포착된다.

혹자는 그의 여성의 성에 대한 극단적 가학성을 맹렬히 비난하기도 한다. 외견상으론 그 지적은 옳고 또 맞다. 그러나 그가 묘사하는 성이나 여성성의 저 깊은 바닥에는 그 가학의 강도에 반비례하는 여성을 향한 원초적 사랑과 숭모가 역설로서 부조되어있다. 그 점이 감독 김기덕의 붉은 악마들이 든 깃발에 적힌 구호이고, 그 점이 그의 가슴에 황금 트로피를 안기는 이들이 부르는 응원가다.

물론 그가 만든 모든 영화가 명작일 수는 없다. 과한 재능만큼이나 과신과 과격과 과급함이 작품의 완성도와 매력을 훼손시키고 몰이해와 오해를 촉발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최근에 했다는 발언도 그의 영화만큼이나 몰이해와 오해받는 부분이 있다.

그의 말들은 영화의 다양성이 보장되지 않는 한국영화계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지만 이 시대에 대한 한 예술가의 처절한 절규이기도 하다.

그의 눈에는 자신의 영화를 외면한 채 오로지 한 극장으로 몰려가는 천만관객들이 마치 저 스칸디니비아 반도에 사는 나그네쥐 레밍(lemming)이나 남아프리카 초원지대에 산다는 산양 스프링벅(springbog)으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무리의 앞에 선 자들이 달리면 아무 생각 없이 따라서 달리고 달리다가 마침내 브레이크를 잡을 수 없게 된 수십만마리의 쥐떼와 산양떼가 스스로의 엄청난 힘의 떠밀림 속에서 차례차례 파도 넘실대는 바다 속으로 죽음의 질주를 끝낸다고 하는.....

20일만에 1천만이 극장입구로 줄달음치는 모습은 나그네쥐와 산양의 그 광란의 질주를 연상하고도 남음이 있지 않은가? 그것이 한국 영화관객과 TV시청자의 한 모습은 아닐까?

나는 '괴물' 김감독을 편들고 싶다. 물론 그를 편드는 방법은 그의 영화를 봐주는 것이다!
 
 

이응진 / KBS 드라마팀 PD , 문화칼럼니스트


 대표작으로 1994년 최수종과 배용준. 그리고 이승연,최지우가 출연한드라마 <첫사랑>과 <딸부자집> 등이 있으며  2004년 KBS 연수원 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HDTV 문학관' 을 제작 중이다.  '타블라 라싸'는  흰 백지 상태를 의미한다. 어린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순백의 상태를 말하듯 철학자 루소는 교육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이 말을 사용했다. 흰백지 위에 생각을 쓰자는 의미에서 이 칼럼이 마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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