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한샘의 예술이야기] ① 세븐과 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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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의 음악은 대단히 영화적이다. 싸구려 일회성 액션영화가 아니라, 고급 추리영화쯤 된다. 처음엔 그 재미를 잘 모르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빠져들어, 헤쳐 나오기 힘들게 만드는 쉽지 않은 상대인 것이다. 이는 인간의 감정에 대해 잔인할 정도로 정확히 파악을 하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여기 아주 대단한 선수가 있다. 수많은 장치와 치밀히 계산된 전략을 중심으로 경기에 임하는 영화와는 달리 이 선수는 그냥 자신의 선율만 가지고 관객에게 도전장을 내민다. 그것도 관객의 취향 분석이나 수시로 바뀌는 시대적 조류에 영합함이 없이 300년 전에 만들어진 주제 그대로 들이 내민다.

그러면 그 게임의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각 분야별 전문가와 둘째가라면 서러워 할 이야기꾼들이 모여서 1년(또는 2, 3년)내내 2시간도 채 안 되는 상영 시간을 잡기 위해 만든, 감정의 긴장도를 내내 잡고 있어야 하는 영화라는 선수와 300여 년 전 영화라고는 단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한 고리 타분한 음악가와의 승부는 너무나 맥없이 끝나버린다.

적어도 필자의 견해에서 본다면 이는 의심할 여지조차 없다. 인간 감정의 군상들을 어찌나 기가 막히게 녹여내는지 바흐의 음악들을 접해보면 식은땀이 흐를 정도다.

이는 공포영화나 스릴러물에 쓰인 그의 음악들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 한 예로서, 잘 알려진 스릴러물 ‘세븐’속 바흐의 음악을 들 수 있다. 여러분들은 은퇴를 얼마 앞둔 늙고 노련한 형사 모건 프리먼과 이제 막 사회물을 먹으며 공명심에 들뜬 그의 파트너 브래드 피트를 기억할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 바탕을 둔 7가지 범죄를 제시하며 살인을 차례대로 공개하는 범인의 등장과 함께, 관객은 서서히 전율을 느끼며 빠져들게 된다. 어딘지 그늘진 듯한 조명과 색조, 을씨년스럽게 다가오는 리드미컬한 템포와 프리먼의 냉소적 연기가 잘 어우러져 영화는 관객들을 별 저항 없이 사건의 현장에 초대한다.

그런데 단 한 장면! 바흐의 음악이 그것도 너무나 맑고 아름다워서 주로 아이들의 자장가나 연인들의 사랑 장면에나 가끔 쓰이곤 했던 음악인 ‘G 선상의 아리아’는 이 영화 속에 자연스레 스며들어 있다.

영화 속에서 모건 프리먼은 시내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놓은 연쇄살인범의 단서를 찾기 위해 늦은 밤, 변두리 도서관을 찾는다. 아무도 없는 서가에 홀로 서서 인간 죄악의 단초를 짚어나가는 기나긴 추리의 여행 속에서 바하의 아름다운 음악은 소름끼칠 정도로 잘 어우러지며 화면 속 살해 장면들을 관조해 나간다.

홀로 책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짜며 시체의 사진 속에서 공통점을 발견하려는 젊은 형사 브래드 피트와 개별 범죄에 가려진 악의 근원적 속성을 단테의 신곡(Divina Commedia)과 초오서의 캔터베리 이야기(The Canterbery Tales) 같은 고전 속에서 찾아보려는 늙은 형사 모건 프리먼의 끈질긴 집념 속에서 바흐의 선율은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이를 극복하려는 그들의 고뇌를 어루만지며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장면을 이끌어간다.

더군다나 단테와 초오서가 묘사해놓은 악령이 깃든 지옥세계의 무시무시한 살해 장면과 참수 장면, 그리고 살인현장에서 난자된 시체 장면이 교차 편집되면서 바흐의 아름답기만 했던 선율은 에덴동산의 사건이후 끝없이 반복되는 인간 죄악을 슬퍼하는, 숨 깊은 탄식 소리로 변하여 우리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있다. 몇 마디 안 되는 단순한 선율로, 태초 이래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끊임 없이 반복되고 있는 인간 죄악의 군상들을 단숨에 훑어나간 것이다.

단조로운 클래식중 하나로 치부하기만 했던 음악 속에서 인간을 위로하고, 그 인간의 죄악을 슬퍼할 수 있는, 깊은 철학적인 음이 스며있음을 발견케 된 것이다. 마치 한 권의 사상서를 접했을 때 느끼게 되는 무게와 함께 동시에 떠오르는 말 못할 후련함...요한 세바스찬 바흐! 오늘도 그를 읊조리며 필자의 발걸음은 비디오 대여점을 향한다.

오한샘  / EBS 교양문화팀 PD 


1991년 입사해 <예술의 광장> <시네마천국> 등 문화, 공연 예술 프로그램을 주로 연출했다. 그 밖에 대표작으로  <장학퀴즈> <코라아 코리아> 등이 있다. 영화, 음악 그리고 미술 등에 조예가 깊으며 현재 연재하고 있는 영화음악 뿐만 아니라 '영화 속 미술 이야기'도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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